(법화경 초목품) 방편을 잘 쓰는 스승으로서
초목품에 보면 마지막 게송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역에도 있는지 모르겠다(기억 가물하나 찾아보기 싫어 그냥 적는다). 초목품과 관세음보문품은 영역에 내용이 조금 더 많다.
무명으로 인하여 그토록 눈먼 세간에
인중존이요 일체를 아는 여래요
본성이 자비로운 위대한 의원이 나와
방편을 잘 쓰는 스승으로서 정법을 보이느니라
가장 상근기에게는
부처님의 위없는 깨침을 드러내지만
중품 지혜의 사람들에게는
도사가 중품의 깨침을 설하고
또 윤회를 겁내는 자에게는
다시 다른 깨침을 설하느니라
부처님은 방편을 잘 쓰는 도사로서 정법을 보인다고 하신다. 근기따라 그에게 적합한 깨침을 설하시니, 상근기, 중품 지혜, 윤회를 겁내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깨침을 설하는 것이 바로 방편이며 그것으로 정법을 보인다고 하신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가 만나는 법이 (부처님의 t섭법이라면) 모두 정법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의 근기따라 설해진 법임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또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이 닿아 있는 법으로 아주 살짝은 그 근기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에 마음이 닿아 있으며 무엇이 마음에 담겨 스스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라. 부처님의 위없는 깨침인지, 중품의 깨침인지, 윤회를 벗어나는 것인지. 윤회의 두려움에 매여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주로 마음 닿아있는지, 윤회의 두려움을 지나 중품의 깨침에 마음 닿아있는지, 중품의 깨침을 지나 부처님의 깨침에 마음 닿아있는지. 곰곰히 생각하면 자신을 가늠할 수 있고 가만히 살펴보면 다른 이를 가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어찌되었든 방편을 잘 쓰는 스승인 부처님을 만나고 따른다면 우리들 각자에게 최선의 일이 될 것이다. 잘알지 못하기에 그 방편들에 대해 시비를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 경전에 쓰여있듯 그의 근기에 맞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시비를 말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또한 알아차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