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치료 희망쉼터)사리불과 수리반특
오늘은 생명카페 희망쉼터 4원소님이 '교묘하게 가리는 것이 두렵다'고 올린 나의 글에 화답하듯 올린 '사리불과 수리반특이 주는 교훈'이라는 글을 읽어보았다. 아직도 글을 올릴 때의 마음에 머물러있는지 모르지만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카페 희망쉼터를 지지하는 이들은 덕명이란 분이 올린 이야기, 표현들을 가져다가 그대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많은 것 같다. 사리불과 수리반특의 이야기도 강의에 나온 것 같다. 글을 열기 전에 수리반특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검색해보니 제목봉창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불자의 태도로 많이 활용한 이야기같았다.
부처님 10대 제자 중 지혜 제일 사리불은 자신의 앎을 내세우는 이의 표상으로, 수리반특은 아무것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믿음과 정성으로 묵묵하게 부처님을 따르는 이의 표상으로 대비시켜 사리불같이 자신의 지혜를 믿고 그것이 다인 것처럼 해서는 안되고 수리반특처럼 그저 묵묵히 부처님법을 따르는 가운데 복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맞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는 흐름을 잘못타면 잘난체하는 너희들은 사리불같은 존재이며 부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정성을 다하는 우리는 수리반특에 가깝다는 이야기로 빠질 수 있으며 위험하다. 이야기를 빌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조금 적어보려한다.
자, 먼저 수리반특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4원소님이 글에 쓰길 부처님을 의심하거나 그 품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수리반특을 표현하고 있다. 이해못해도 부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근기로 이해못해도 그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수리반특이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다른 말을 하고 다니면서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전했다면 부처님은 수리반특의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너는 바르게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수리반특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부처님을 의심하지 말고 그 품을 절대적으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경전의 이야기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하나만이 가치있다고 말하며 그 외의 것은 의미없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품에 의심없이 머물렀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나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각자의 이해이니 그것이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다. 또 나의 의견 역시 개인의견이라 말할 뿐 이것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고? 내가 지혜제일 사리불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리반특은 지혜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불법 수행을 통해 이르러야 하는 자리에는 지혜도 있었을 것이다. 수리반특 안에 있는 불성이 온전히 발현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업장으로 가려졌기 때문이리라. 그 업장으로 우둔함을 타고 났을 때 그는 부처님을 향해 죄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지으며 살아감으로써 그 업장을 그대로 넘어서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글을 아는 이라면 생각해보라. 그가 업장을 넘어선 자리에는 지혜도 있었을 것이니. 전에는 없었던 사리불같은 같은 지혜가 이제 온전히 발현되어 그의 것이 되었을 것이니.
이제 사리불을 이야기해보겠다. 사리불은 10대 제자 중 지혜 제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리반특과 대비된 이야기에는 사리불이 그다지 바르지 않은 품성의 소유자로 표현된다. 왜일까? 지혜가 갖추어졌다고 다른 품성이 그대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을 생각해보면 답이 그대로 나온다.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불보살의 품성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만난다. 또 보살도의 육바라밀을 생각해보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가지를 닦아야 한다. 사람마다 근기, 인연이 다르니 이 여섯가지 중 한, 두가지를 닦는 이도 있지만 결국은 이 여섯가지가 온전하게 발현되어야 우리가 찬탄하는 불보살님에 가까워진다. 그것은 갑자기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닦아가야 하는 일이다. 지혜만이 전부라면 육바라밀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맞지 않은가?
사리불이 수리반특 이야기에 나올 때 수리반특의 장점에 반하는 품성으로 표현된다고 지혜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다. 나도 잘모른다. 단지 내가 부처님 법을 배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을 표현할 뿐이다. 우리는 사리불인가. 수리반특인가. 때로는 사리불이 되어 지혜에 이르러야 되고 때로는 수리반특이 되어 묵묵하게 상황을 수용하며 부처님 법에 일심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 때로는 사리불에 반해 시기, 질투를 벗어나야 하고 때로는 수리반특에 반해 우둔함을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사리불과 수리반특의 이야기에서 불자가 읽어야 하는 진실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누가 사리불이고 누가 수리반특인가. 모든 이들이 동시에 사리불이기도 수리반특이기도 하다.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리면 그만이다. 상대를 향해 사리불같네, 수리반특같네 말하기 이전에 자신이 어떠한지를 살피는 것이 더 유익하다. 위에 적은 것 같은 이야기?, 밤을 새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유익한가. 결국은 너는 잘못이고 나는 잘하고 있어 할 뿐인 이야기에 어떤 불보살이 있어 함께 할 것이며 미소지을 것인가. 교묘하게 가리는 것에 대한 생각은 법을 배우고 살아오면서 갖게 된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타인이 가리기도 하고 내 스스로 가리기도 한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스스로의 탐진치에 가려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나도 글을 읽는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