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치료 희망쉼터 주장에 대한 글)(1) 월장경의 삼시를 공부하라
먼저 비판의 글이 아닙니다. 바르게 아는 것인가를 서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법은 바르게 아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며 좋은 것 아닐까요? 많은 이들이 경을 읽고 베껴쓰고 선정 삼매에 드는 수행을 하고 여러 불보살의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해가는데 그 불보살이 그 수행법이 공덕없다 하면 한번 정말 그런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문제인데요.
공왕불 기도에 대한 제 글을 읽고 답글을 쓴 분이 저에게 삼시(정법, 상법, 말법)를 공부해보라 하더군요.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그 정도로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삼시가 모든 것을 밝혀줄 열쇠가 되리라 생각들었습니다. 책을 직접 읽은 것이 아니라 아쉽지만 월장경으로 검색하니 올라온 글들이 비슷해서 그 중 하나를 발췌해서 쓰겠습니다.
먼저 월장경 발췌부분입니다.
⑴ 해탈견고 오백년 - 정법시 전반기
於我滅後五百年中, 諸比丘等, 猶於我法解脫堅固. (어아멸후오백년중, 제비구등, 유어아법해탈견고)
내가 멸한 후 오백년 중에는 모든 비구들이 나의 법으로써 해탈이 견고하리라
⑵ 선정견고 오백년 - 정법시 후반기
次五百年, 我之正法, 禪定三昧得住堅固. (차오백년, 아지정법, 선정삼매득주견고)
다음 오백년은 나의 정법에서 선정 삼매가 견고하리며
⑶ 다문견고 오백년 - 상법시 전반기
次五百年, 讀誦多聞得住堅固. (차오백년, 독송다문득주견고)
다음 오백년은 독송과 다문이 견고하리며
⑷ 탑사견고 오백년 - 상법시 후반기
次五百年, 於我法中, 多造塔寺得住堅固. (차오백년, 어아법중 다조탑사득주견고)
다음 오백년은 나의 법중에 탑과 절을 많이 세운 이 견고하리며
⑸ 투쟁견고 오백년 - 말법시 전반기
次五百年, 於我法中,鬪諍言頌白法隱沒, 損減堅固. (차오백년, 어아법중, 투쟁언송백법은몰, 손감견고)
다음 오백년은 나의 법중에 말과 글로 다투니 깨끗한 법은 자취를 감추고 줄어듬이 견고하리라.
이것이 생명치료 희망쉼터나 남묘호랑게쿄에서 수행의 방식을 주장할 때 근거로 내세우는 월장경의 글입니다.
이 글을 이렇게 이해하고 주장합니다. '글에 적혀진대로 수행은 시대마다 정해진 방식이 있다. 그러니 선정삼매에 드는 것도, 가르침을 읽고 외우는 것도, 탑과 절을 세우는 것도 다 지나간 시대의 수행법으로 말법시인 지금에는 공덕이 없다.' 생명치료 카페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도 말합니다. '정법 상법시대에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약사여래 지장보살 등의 불보살님들께서 석가모니세존의 위임을 받아 중생구제를 하셨고 그 임무를 이미 마쳤다. 후오백세(석존멸후 다섯번째 오백년부터 영겁에 이르기까지, 현재가 말법시대에 해당)에는 법화경 이외의 모든 이전의 모든 경전은 힘을 잃는다.'
정말 그럴까 저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어느 분이 삼시에 대해 적은 글을 읽었는데 제가 예전에 불교대학에서 배웠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삼시에 대한 이해입니다. 시간상 정법은 석가모니 부처님 멸하신 후 정법이 천년, 상법이 천년, 말법이 만년 머문다고 합니다. 정법은 부처님의 바른 법이 살아있는 시기로 많은 이들이 부처님 법을 이해입니다. 상근기가 많지요. 상법은 모양이, 즉 껍데기가 불법인 시기로 그보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이들이 줄어듭니다. 상근기는 줄고 중근기가 많아지지요. 말법은 법이 사라지는 시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이들이 거의 없어집니다. 상근기 중근기가 줄고 하근기가 많아집니다.
말법시에 법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사실 법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 법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이들이 사라지는 겁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부처님이 멸도하는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멸도를 보이지만, 이미 말씀하셨듯 멸도한 일도 없으며 따라서 진리를 통찰하는 이에게 부처님은 살아계십니다. 법 또한 이와 같아 정법이든 상법이든 말법이든 법은 늘 살아있습니다. 중생의 근기따라 방편을 쓰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법이 아니며 결국 하나의 법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법을 말합니다. 팔만사천의 법문이지만 결국은 근기따라 쓴 법이며 본질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이런 시대의 특성을 고려하면 정법시에는 부처님 법으로 해탈에 드는 이가 많았고 선정삼매에 견고히 머물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상법시에는 가르침을 듣고 외우고 탑과 절을 세워 불법을 수행함에 견고히 머물 수 있는 수준이었고 말법시에는 법을 다투고 깨끗한 법, 즉 정법이 사라지는 모습이 확연하다는 것입니다. 즉 수행의 수준이 그러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그 수행만이 공덕있다고 이해하면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해탈에 들 수 있는 이가, 선정삼매에 견고히 머물 수 있는 이가, 가르침을 듣고 외울 수 있는 이가, 탑과 절을 세워 부처님 법을 따를 수 있는 이가 이제 말법시라고 그 수행법을 버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법화경이 최후의 가르침, 최상의 가르침임을 인정하고 저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읽고 외우는 것이 지나간 수행인데 도대체 법화경 가르침은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읽고 사유해서 얻는 것 아닙니까? 가르침을 읽는 것은 상법의 수행이고 사유하여 깨달음은 정법의 수행인데 생명치료에서 말하는 가르침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요? 이미 자신들이 주장하는 공덕없고 지나간 수행법을 통해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발목을 옮아매는 그 주장이 이해되나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그들이 주장하길 법화경만 남고 법화경부처님(우주부처님, 공왕불인가요?)만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로 그렇다고 하면 이상해지는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무량수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덕분에 정토삼부경을 훑었습니다. 원하는 구절을 찾기 위해 대강 대강 넘어갔는데 너무 좋습니다. 어떻게 현생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서 꼭 다시 읽으리라 생각하며 넘어갔습니다. 염불하는 분들은 꼭 정토삼부경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중생들을 위해 이 경을 설하고 무량수불과 그 국토에 있는 모든 것을 보게 하였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모두 왕생을 구해야 하느니라.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다시 의혹을 일으켜서는 아니되느니라. 미래 세상에 경전과 도가 모두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나는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 중생들을 애민히 여겨서 특별히 이 경전만은 백 년 동안을 더 머물게 할 것이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만난다면 뜻하는 대로 모두 다 얻을 수 있느니라.'
딱 말법시의 이야기, 그것도 모든 경전과 도가 사라진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부처님이 다른 것이 아닌 이 무량수경을 자비로 남긴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극악한 근기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미타부처님, 염불이기 때문이겠지요. 답글을 적은 분이 말했듯 법화경의 가르침은 쉽지 않습니다. 그 쉽지 않은 가르침만 남는다면 얼마나 많은 이를 구제할 수 있을지, 부처님의 자비를 들어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닿아있는 부처님의 자비라면 근기따라 한 사람이라도 가르침에 더 인연될 방법을 강구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경전에 명확하게 나와있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말을 주장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향하는 이들의 마음을 흐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또 지장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미륵부처님 오실 때까지 염부제의 모든 중생을 지장보살에게 맡기십니다. 미륵부처님 오시기 전 말법시에도 여전히 지장보살님이 죄업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또한 경전의 명확한 가르침이니 법화경 부처님만 남고 다른 불보살님은 일을 마쳤다는 그 말은 부처님 가르침과 다릅니다.
또 법화경 자체의 가르침과도 어긋납니다. 법화경의 홍포를 서원한 많은 이들을 생각해보세요. 법화경의 홍포를 부촉한 많은 보살들을 생각해보세요. 보살종지용출품에서 수도 없는 보살들이 말세 말법시에 법화 법문을 지니고 읽고 홍포한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왕화보살은 말세 말법시 후오백세에 본사품을 유포하라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습니다.
제가 법화경을 읽어오면서 스스로 경이로움을 느끼는 점은 그 가르침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나로 녹아들어간다는 것, 여러가지 법들에 대해 차츰 걸림이 없어지고 포용해나가는 가운데 일불승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을 들으면 정확하게 배우거나 공부한 것이 아니더라도 점점 더 그 법들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정도의 근기에서도 이런 마음, 생각의 변화가 있는데 근기 높은 이는 어떨지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저는 하근기라 안다고 할 법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공왕불 기도에 대해서 글을 적었을 때 답글을 적은 이는 저에게 본인 수행 열심히 하라고, 법화경 기도하면서 자신이 바뀌지 않는다면 헛공부 헛기도하는 것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법화경을 공부한다면 (또 그의 글을 보건대) 그 정도로 확신을 갖고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칠 정도라면 내가 보는 이것을 그 사람도 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공부를 바르게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부한 것으로 마주하는 이의 마음을 밝히는 것도 또한 수행의 연장이라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 스스로도 잘못 들어서 있는 길을 깨달아 다시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구요. 어제는 솔직히 급한 마음에 월장경의 글과 생명카페에서 주장한 글을 찾아 비교하며 글을 적으려고 했는데 월장경을 베껴 적다가 생각이 명확해지지 않더군요. 그냥 잠자리에 들면서 무슨 말인지를, 내가 잘못 아는 것이 아닌지를 곰곰히 생각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면서 생각이 명확해진 것 같아 글을 적고 있습니다. 여전히 제가 글을 씀은 옳다고 주장하거나 시비를 가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단지 바른 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하고 싶습니다.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했던 법에 관한 논쟁이 될까 고민되지만 바르게 알고 바르게 나누는 것은 좋은 것이니까요.
쓰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 날입니다. 무엇이든 법은 부처님에게 배워야 한다 생각합니다. 바르게 알겠노라 뜻을 세우고, 내 안의 불성이 이끄는대로 나아가는 날이 되기를, 또 이상하다 생각드는 지점이 있다면 아까워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부처님의 진실한 음성을 듣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용기있는 날 되기를, 나도 글 읽는 모두도 그런 날 되기를 기원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