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홍익학당)[원효, 정토를 말하다]를 보다.

향광장엄주주모니 2018. 7. 31. 09:54

의무감으로 봤다.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띄엄 띄엄 봤다.
이일을 하다가 보고 저일을 하다가 보고 사실은 마지막 부분이 조금 남았다.
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봐야 할 것 같아서 봤다.
요즘 부쩍 날씨를 타고 게을러졌기 때문에 오래 걸리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정토종 추종자의 글을 많이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터넷에서 접하게 되는 글들을 보면 경전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왜곡하거나 잘못 알려준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은 중생 근기에 맞춰 이런 저런 방편으로 설하신 법이니,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이끄는 자의 오류인지, 따르는 자의 오류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이라는 상이 너무도 강했고 때로는 경전의 내용과는 상이한 듯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오류가 아닌 그 근기에서의 해석일 수 있다. 너무 높아 내가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수도 있고 너무 하열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알아차린 것일수도 있다.)
혼자만의 수행이 아닌 단체를 이끄는 수행이 될 때, 이끄는 자는 분명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해야 할터인데, 하물며 법을 설함에 있어서랴.
방편이라 하더라도 그 방편은 불법을 훼손하고 사람들을 오도해서는 안된다.
다음 아미타불 카페에 올라온 한 스님의 염불수행기에 답글을 달았을 때, 그 글이 불온하다고 여겨졌는지 카페지기가 강제로 내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비난하기 위해 글을 적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경전에서 배운 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옳지 않은 것은 떠나고 바른 것이면 수용하면 그뿐이다.
그 사람들이 바르게 아는 것이라면 나를 가르치면 될 뿐인데.

부처님 법을 배우는 나는 분명 중생으로서 땅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그와 동시에 부처님 뜻을 이어받은 불자로서 또 보살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땅을 디디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제목의 주인공인 원효대사조차 불법의 이치를 다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갔다면(부처님이 되었다면) 그저 미소지을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고민을 했구나 하고.

나도 예전에는 기독교의 '믿으면 천국간다'는 논리가 영 못마땅했다.
죽을 죄를 지은 자도 그저 '믿습니다' 하면 천국을 간다고?
당연한 인과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 황당한 상황이 어이없기도 했다.
그 상황이 불교의 정토신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여전히 어이없고 못마땅할까?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첫째, 인과가 엄연하다면 그 인과가 답이 될 것이다.
수없이 윤회하며 살아온 그의 모든 업을 다 알 수 없으니, 그 업을 알 정도가 되었을 때나 정확하게 '인과에 따르면 그 사람은 그럴 정도의 선업을 지었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추측이 찜찜할 수도 있지만, 이 정도 확신할 수 없는 논리에 내 인생을 걸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사촌으로 신통력과 욕망에 눈이 멀어 악행을 범했던 제바달다도 부처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
부처님 재세시에 악행의 아이콘같았던 제바달다이지 않은가.
그런 그도 과거에 부처님께 큰 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살짝 빗나간 내용이지만, 한번의 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부처의 마음, 보살의 마음이 답이 될 것이다.
이제 갓 보살의 마음을 배우는 나도 가끔은 세상이 가엾다.
가끔은 기도의 공덕을 온전히 세상을 위해 회향한다.
생각해보라.
별 보잘것 없는 나도 이런 마음을 품고 공덕을 갖추기를 원하고 그 공덕만큼 세상이 유익하기를 원하는데, 큰 보살이면 어떻고 부처면 어떻겠는가?
고통스러운 자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편안하지 않은 자는 편안하게 하고, 결국 모두가 부처의 경지에 이르러 무명을 벗어난 평온을 누리게 하자는 원을 품었는데, 무엇을 가리겠는가?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지옥을 벗어나기 원하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다시는 사바세계에 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 줄 것이다.
그게 부처고 그게 보살의 마음이지 않을까?
시작은 그렇게 될 것이다.

셋째, 변화하는 우리가 답이다.
처음에는 불법을 몰랐다.
나의 안위를 위해 부처님을 불렀다.
탁하고 악한 이 세상이 싫었고 그래서 정토가 그리웠다.
부처님을 부르다 보니 내 안의 불성이 깨어났다(드러났다).
내가 고통을 싫어하듯 다른 이들이 고통받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편안하고 남도 편안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자비가 일어나니 지혜가 그리웠고 원만한 힘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수행한다.

모든 것이 허상이라도 괜찮다.
모든 것이 방편이어도 괜찮다.
이것 저것 가리던 마음에서 조금은 자유로졌다.
어떤 옷을 입었든, 어떤 길을 가든 뜻이 같다면 괜찮다.
내가 좋고 너도 좋다면 다 괜찮다.
네가 좋다면 나는 괜찮고 싶다.
오늘은 씨를 뿌리고 인연을 지어주는 것으로도 괜찮다.
아미타불 몇번에 정토에 왕생한다고 삐죽대지 말라.
부처님이 무량한 공덕을 베풀 때,
그 조건에 부합한 힘으로 불렀다면 열번을 불러도 가는 것이고
그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매일을 불러도 어려울 것이니.
내가 한번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했다면
내가 어떤 정성과 어떤 마음으로 불렀으며
전생부터 어떤 인연을 지어 왔는가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배운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생각하는 바일 뿐, 내일이면 어디로 나아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