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강력하고 빠른 가피, 그 이후는 무엇인가.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8. 11. 17:28

경전을 읽어보면 부처님의 뜻은 누군가 말하듯 인간삶의 강력하고 빠른 가피에 멈춰있지 않다. 결국은 무명에서 벗어나 걸림없이 자유로운 경지, 모든 것이 그대로 온전한 부처에 이르는 것에 그 뜻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걱정없이 잘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 가피를 운운함이 과정이라면 괜찮지만 그 과정을 거쳐 변화될 것이 없다면 앙꼬빠진 찐빵같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강력하고 빠른 기도 가피를 주장하면서 오늘을 잘 사는 것의 행복함을 말하는 마음은 정말 자유롭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마음일까. 좋을 때는 누구나 좋을 수 있다. 문제는 정말 좋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좋을 수 있는가이다. 가피의 여부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은 그 가피가 허물어지는 순간 함께 허물어지기 십상이다. 또 내가 행한 것에 대한 과보를 순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은 인과를 통찰해야 닿게 되는 마음이며 그 자체로 편안함과 자유로움에 이르게 한다. 따지고 보면 수행을 통해 닿고자 하는 마음의 자리는 그런 자리이지, 가피가 있으니 웃음지어지고 가피가 있으니 더 훌륭하다고 기도를 주장하는 마음자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잘 사는 것으로 충분한가. 오늘 배 두드리며 잘사는 것이 그대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 오늘도 중요하고 다가올 미래도 중요하다. 그대의 기도에는 미래의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리의 상황은 마치 1학년 교실에 공부하러 나오라고 간식으로 유혹하는 선생님과 학생들과 다르지 않다. 교실에 나가니 간식을 주어 내 입이 당장 즐겁지만, 정작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2학년 교실에 들어갈 수 없다. 간식만 먹지 말고 그 간식을 준 이유가 된 공부를 해야 교사는 참다운 만족감을 느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2학년의 공부를 감당할 수준이 될 수 있다.  


법화경 묘장엄왕 본사품을 생각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명확해진다. 만약 묘장엄왕이 두 아들의 신묘한 신통력에만 마음을 빼앗긴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천만년이 지나도 부처되리라는 수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묘장엄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서 왕위를 아우에게 넘기고 출가했으며 법을 듣고 나서는 그 법, 법화경의 가르침을 외우고 사유함으로 수행해나갔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내 마음이 괴로워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해서 괴로움을 벗어났다면 이제는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그것으로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여전히 괴로움을 벗어나서 현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모든 의미인듯이 주장한다면 길에 들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엇이 가피인가. 내 현생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것도 가피요, 내 현생의 즐거움을 만나는 것도 가피겠지만 그것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걸림없이 자유로우며 불가능을 넘어서는 것을 성취하라. 시간이 흘러도 가피 운운하는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매여 있는가. 떠날 때에는 떠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맞이할 수 있다. 가피에 집착하는 그 마음을 떠나라. 강력한 가피, 나도 좋아하지만 그것에 내 기도를 걸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참으로 고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고귀한 것이 결국은 모든 강력한 가피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