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그대로 읽는 것에 대한 생각
법화경을 읽다가 작년인가 묘한 경험을 했다. 백번을 넘게 읽어왔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유를 일으켰겠는가. 그런데 어느날인가 법화경을 읽다가 경전의 구절이 글자 그대로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바보스럽지 않은가. 다른 것이 아니라 경전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다시 말해서 숨은 뜻이나 온갖 미묘하고 깊은 이해가 아닌 구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그 시간과 노력을 거쳐서 이제야 글자 그대로 읽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순간 안개걷히듯 어느 한 부분이 밝아졌었다.
그것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사람마다 갖는 시각, 상, 견해라고 할지, 가르침을 가르침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것 같다. 법화경 법사공덕품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드러난 뜻 외에도 숨은 뜻, 다시 말해 표현된 것 이상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경험으로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시각, 견해로 흐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3년을 꼬박 읽어 글자 그대로 읽기 시작할 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비슷한 경험을 며칠전 정토삼부경으로 글 적을 때에도 했던 것 같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으로 미소지었고 어떤 부분이 시원해졌다. 물론 오래 많이 읽은 자가 아니기에 통찰함이 부족하여 하나로 시원하게 꿰어진 상태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부처님의 48대원 중 중생의 극락왕생을 말하는 18원, 19원, 20원을 옮겨적다가 이제서야 오역죄와 정법비방의 단서를 붙인 18원을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이 되었다. 그것으로 맞다 싶어 편안해졌다. 아직 글로 적기 편하지 않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그 부분도 구체적으로 적을 날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오역죄와 정법비방의 단서가 18대원에 붙여진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읽는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른다면 적힌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지, '그래도 아닐거야' 하면서 내 입맛에 맞게 이것 저것을 가져다가 억지로 적혀있는 가르침을 뒤집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된다.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하는가. 가르침은 부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사람의 생각으로 지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럴 힘이 지금 우리에게 있다 보는가. 혹시라도 나는 오역죄와 정법을 비방한 자이니 18원으로는 극락왕생이 어렵겠다 낙담말라. 나 역시 처음에 18대원 부분을 읽었을 때, 오역죄를 찾아 읽어보았고 '나는 안되겠구나'싶어져서 마음이 불안했었다. 그런데 괜찮다. 19원도 있고 20원도 있으니 말이다.
경전을 읽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나를 주장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전에 대해 나의 이해가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경전의 흐름 속 가르침과 상충한다면 나의 이해를 접고 다시 사유함이 마땅하다. 벗어나지 못하는 상충에도 불구하고 내 주장을 펼치는 순간 가르침이 왜곡되기 시작한다. 작은 거짓말 하나가 이어지고 이어져서 전체가 엉망이 되는 것과 같이, 초기에 바르게 조치되지 않은 댐의 작은 구멍으로 댐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경전을 대하여 바르지 않은 이해에 집착하는 이는 큰 흐름에서 벗어날 위험에 노출된다. 개인의견이다.
아무튼 경전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경전을 읽고있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글자는 제대로 읽었는가'. 그것이 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