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그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이를 위해 글을 적었었다. 많은 댓글들이 달렸는데, 어제 어떤 이가 댓글을 적어왔다. 그동안 두 차례인가 내 글에 댓글을 달았던 이였다. 오늘은 그 댓글을 올리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 이야기이며 좋다고 할 이야기가 아니니 단지 허물을 말하는 글이 될까? 그렇지 않다 생각한다. 허물이라 생각하는 마음도 아니거니와 허물로 말하기 위한 마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생각함을 글로 적는 것이며 이상하다 생각드는 그 지점이 무엇인지를 사유하고 싶을 뿐이다. 서로 밝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의 글을 보건대 불교를 많이 공부한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글에 적는 여러가지 유식한 표현들, 누가 이런 말을 했고 누가 저런 말을 했고, 이 법은 이러하고 저 법은 저러하다는 표현들로 보건대 많은 공부를 해왔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글을 대하며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이런 저런 가르침에 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많은 법을 말하고 있었는데 법을 안다면 닿아있을 걸림없는 자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글자에 매이고 표현에 매인다고 해야 할지. 드러난 정법을 말하는 것이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댓글을 달았을 때가 수행에 대한 이야기였고 댓글이 불성으로 이어졌다. 생각해보라. 불성을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가. 말로 담을 수 없지만 담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여러가지 표현으로 불성을 이야기해왔다. 그는 누군가 이렇게 표현했다면서 불성의 본성을 표현한 구절들을 적어왔다. 어느 순간이 되자 주거니 받거니 하는 글들이 더 이상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밤을 새서 불성은 이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다 맞다고 대꾸할 일이니 말이다. 가장 핵심적인 논점이 나는 불성은 그런 것이나 불성을 보았다고 충분하지 않으니 수행을 통해 불성과 합치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는 단지 불성이 이러하다고 언급하면서 그 자리가 수행과 떨어져 있는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가 불성에 대한 표현을 바꿔 반복될 뿐인 상황이다 보니 '그래서 뭐 어쩌라구? '라는 심정이 되었다. 글이 다 기억나지 않아 찾아보니 자신의 댓글을 다 삭제한 상황이라 더 세부적인 내용을 정확히 적기가 어렵다. 어찌되었든 그런 내용이었다.
생각해보건대 배워서 아는 바가 있지만 뭔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만나게 되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 편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이렇게 말하지만 내가 알기로 불성은 이런 거라고 했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고 다른 분은 이렇게 말했고 어떤 책은 이리 적고 있고 다른 책은 이리 적고 있어.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말하는건데? 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나라면 스스로 충분히 사유할 것이다. 자신의 사유로 견고해지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본질에 닿게 되면 자신이 아는 바와 달리 말하는 이에게 자신의 이해를 역량만큼 펼칠 수 있다. 상대방이 설령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법에 대해 스스로는 편안한 마음이 될 것이다.
두번째 댓글을 달았을 때가 보살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내 글에 비판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적은 글귀 하나를 들어 잘못된 지점에 대해 자신의 이해를 적어왔다.
글을 왜 읽는가? 나로서는 궁금해서 읽고 배울 바가 있다면 취하기 위해 읽는다. 이상하다면 바른 것으로 돌이키기 위해 읽는다. 그런데 첫 말이 비판할 것이 없다 하니 사실 기분이 묘했다. 무슨 목적으로 글을 읽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나와 다른 이유 아닐 것인데 나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문제시한 그 구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표현은 내가 법을 바라보는 본질도 아니었고 단지 어떤 이가 주장하는 논리의 오류를 말하기 위해 글을 적으면서 앞서 활용했던 표현을 가져다 쓴 것에 불과했다. 글은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엉뚱한 이해로 나아가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며 그 글귀가 가지는 의미와 무게를 저자의 의도에 맞게 이해할 수 있다.
이번이 세번째로 윤회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뭔가 그 댓글들이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자체가 불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아니 마니 거론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불교를 안다고 하는 이는 얼마나 아는 것이며 모른다고 하는 이는 얼마나 모른다는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안다 한들 안다고 내세울 무엇이 있을까. 자신이 닿아있는 법의 한자락을 나눌 뿐이며 그것으로 누군가가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워지고 밝아진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부처님은 가지 각색의 중생들을 그대로 수용하신다.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에서 시작하여 법의 본질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말할 때 옳으니 그르니 이러하니 저러하니에 중점을 두는 것은 부처님이 행하신 바와 가깝지 않다. 또 그런 마음은 우리 불성을 가리는 중생심, 분별심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미묘한 문제이다. 같은 것을 말하는 듯 해도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 이런 것을 이렇게 저런 것을 저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얹어지기 시작하면 흐려지는 것 같다.
중생이 있다 없다로 판단하려 한다고 했는데 중생이 그러하다 생각하는 그 마음이 단지 알아차림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오해나 착각일 수 있지만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에 매이는 것 같아 조금 불편했다. 또 연기라 하든 무엇이라 하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을 또 길게 적기 시작하여 의문들었다. 어떤 댓글은 내가 적은 표현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에서 시작하여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에 매여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글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큰 착각와 오해로 이어질 수 있지만 여러 글에서 공통된 것을 느낀다면 그 사람이 그러하다 말해도 어느 정도 타당하지 않을까. 아주 작은 마주침이며 그것을 무엇이라 딱 표현하기 어려우니 그 마음을 보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소소한 것들에 매이며 자주 걸린다면 자신이 법에 제대로 닿아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법을 안다 말할 수 없는 나도 예전과는 다르게 사소한 것들에 걸림없기고 하고 자유롭기도 한 지점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러니 법을 참으로 통찰한다면 얼마나 자유로워질 것인가. 사소한 말에 걸리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상대가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밝힐 수 있고 다양하게 표현되는 법의 본질을 누구나 이해하도록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쓰다보니 길기도 하고 다소 산만하기도 하다. 이렇게 물으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글을 쓰는 그대의 마음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에 머무르며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가. 지금 글을 적는 나에게도 물어봐야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