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1. 28. 09:10

염불에 대한 생각이다.

누군가는 나무아미타불을 하든 아미타불을 하든 상관없다고 한다. 누구는 아미타불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먼저 나는 아미타불 4글자로 부른다. 처음에 염불은 당연히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인연맺은 천태종에서 관음정진시 관세음보살만 연창하는 것을 보고 나도 염불을 아미타불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바꿨다. 그리고 그 후에 법화경을 읽으면서 염불은 아미타불 4자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아미타불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거론한 어떤 큰 스님의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글을 적는다. 누군가는 나처럼 아미타불 4자로 염불할테니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스님의 논리는 나무에는 귀의, 공경, 정례, 제도의 의미가 담기기 때문에 ‘아미타불’네 자로만 염불하는 것은 단지 수행만 중시하는 것이며, 또한 수행을 하더라도 예불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 수행이 매우 간절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일리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마땅치 않다는 표현에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무를 붙이고 안붙이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부르는 그 마음은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르는 그 순간 귀의, 공경도, 정례도, 제도도 마음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염불은 부처님을 마음에 담아 생각하는 것이다. 법화경에는 일심으로 염불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오로지 부처님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소리를 내든 속으로 하든 그 핵심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르는가를 생각해보라. 왜 부르는가? 아주 단순 무식하게 말하면 좋다고 하니까 부른다. 좋다는 일말의 믿음이 있어서 소리를 내든 속으로 하든 생각하고 부른다. 그렇다면 좋다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아마도 발원의 마음, 의지한다는 마음, 믿는다는 마음이 아닐까?


다시 묻겠다. 왜 부처님을 부르는가? 부처님을 믿어 부르는가? 그렇다면 나무를 붙이든 붙이든 않든 그것은 이미 예불이며 존경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믿음과 상관없이 입으로만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 솔직히 잘모르겠다. 생각이 말을 따라가기도 하니 나무를 붙여 부를 때 더 귀의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생각이 말을 따라간다면 생각없이 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마음에도 부처님이 새겨질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새겨진 마음은 변화할 것이다. 무량한 자비, 힘, 공덕을 갖추신 부처님 아니신가. 부처님의 명호는 살아있고 힘있는 글자다. 그 살아있고 힘있는 글자가 부르는 이의 마음에도 응하신다면 그 마음에 공경과 찬탄이 드리워지지 않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나로서는 아미타불 4글자로 족하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르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고 완벽한 염불이다. 큰스님의 말씀이니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마치 부처님을 부르는 나의 마음이 나무를 붙이고 안붙이는 것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그래서 마땅치 않다는 논리로 흐려지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믿고 부른다면 이미 부르는 그 네글자에 귀의든 공경이든 정례든 제도든 그 무엇이든간에 내 마음과 뜻에 따라 모든 것이 담긴다. 부처님이 그것을 모르실리 없다. 그리고 믿지 않고 부르더라도 살아있는 명호이니 그 힘으로 부르는 이의 마음에 차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핵심은 부처님의 명호이다. 다른 것은 도울 뿐이다.


나의 이런 생각이 염불하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기를 바란다. 혹시라도 이런 생각이 철저하게 잘 몰라서 하는 무식한 소리라면 자비롭고 지혜로운 부처님, 나의 불성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밝은 자리로 이끄시기를 간절히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