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나의 수행 3가지, 그런데 기도에 욕심내지 않았으면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21. 16:54

기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내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기도의 가피나 영험을 제 1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 같다.


우연히 광명진언을 알게 되었고 그 인연은 지장기도로 이어졌다. 인터넷에서 읽게 된 지장기도의 영험담은 신세계, 그 자체였다. 가피를 목적으로 시작한 나의 수행은 1년 정도 지장경을 읽으면서 불자답게 변화되었다. 중간에 현생의 소망을 위해서는 관세음보살, 관음기도가 더 적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지만, 그냥 지장경을 읽고 지장보살을 부르며 수행을 해나갔다. 언제부터인가는 보이지 않는 인연존재들을 위해 늘 독경시에 13품을 읽기 시작했다. 귀신도 영가도 이 경전 가르침을 듣고 유익함을 얻기 바라는 원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100독은 아마 못채웠지 싶고 사경은 2번 정도 한 것 같다. 당시에는 지장경에 더해 츰부다라니를 제법 많이 외웠다. 그렇다고 해도 기도 많이 하는 이들에게 명함도 못내밀 수준이지만.


그 이후 불교 관련 카페에서 이런 저런 기도와 경전에 대한 글들을 섭렵하다가 '법화경은 읽을 자격이 돼야 읽을 수 있다'는 어느 스님의 말이 담긴 글을 읽게 되었다. 무슨 경인지, 정말 그런 것인지 궁금했다. 법화경을 읽은 것은 최상의 것을 하고 싶다는 욕심(?)과 호기심, 그와 비슷한 여러가지 마음의 작용이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지장경 수행을 통해 가리워져 있던 불성이 미미하지만 드러나면서 법화경 읽을 바탕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법화경이 처음이었다면 아마 오랜 시간을 겉돌거나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그냥 읽기 시작했는데, 보현보살품의 삼칠일에 대한 구절에 끌려 21일 동안 7번을 읽었다. 그리고 법화경을 구매해서 읽고 또 읽어나갔다. 이미 언급한 바가 있지만 특별한 일, 신묘한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 사유하게 되는 구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음은 환희로 물들어갔고 마음을 가리던 분별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갔다.


아미타불은 언제부터 마음에 담기 시작했는지 명확하지 않은데 법화경을 읽으면서였던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었던 아미타불이었지만, 시시때때로 찾게 된 불교 카페에서 염불의 가피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언젠부턴가는 자비롭고 원대한 광명의 아미타부처님을 부르게 되었다. 처음 부르기 시작한 것은 현생도 안락하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하고픈 마음의 원때문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주장을 보건대 법화경을 읽는 이는 법화경만을 주장하고 염불하는 이는 아미타불만 주장했다. 그런 속에서 나는 편안하고자 했고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극락왕생한 이후 불법을 배워 부처가 된다면 법화경의 가르침을 반드시 배울 터이다. 그러니 나는 그 법을 지금부터 배우겠다. 부처가 된다면 법화경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편안했다. 또 법화경을 읽는 다른 이들이 관세음보살을 부를 때,  아미타불을 부르며 이렇게 발원했다. '부처님, 저는 아미타불을 부를 때, 이 명호에 모든 불보살을 담아 부르겠습니다.' 법화경과 염불수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법화경과 아미타불과 함께 수행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능엄주다. 능엄주 역시 불교 카페에서 알게 되었고 아비라 기도를 주로 하는 한 카페에서 관련된 글들을 꽤 읽었던 것 같다. 능엄주는 마를 깨부셔버리는 주, 부처님의 정수리에서 나온 주라고 했다. 모든 다라니가 불보살님의 선한 뜻과 힘을 지니지만, 악독한 세상에서 수행해가는 불자로서 강력하기 짝이 없다는 이 주를 듣고는 마음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사이버법당에 올려진 녹음을 들었는데 이제는 화면을 열고 읽는다.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처음에는 발음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전생에 아마 능엄주를 수행한 적이 없었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매일 매일 하다보니 이제는 입에 제법 익는다. 무엇이든 낙담하지 말고 꾸준히 정성스럽게 해나가는 것으로 답을 삼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외워지든 마음내어 외우든 외워 읊는 날이 오겠지, 한다. 능엄주를 독송하며 세상도 나도 밝아지기를 발원하는데, 작년부터는 가급적 매일 매일 1~3번씩 독송하려고 하고 있다. 올해는 3회 독송을 목표로 하는데 쌓이고 쌓여 불자의 삶을 밝힐 힘이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내 이야기를 쭉 읽으면 이 사람, 엄청난 욕심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도를 만난 그 마음에 욕심이라 할 것이 조금은 작용했다고 보고 있으며, 지금 이 3가지로 수행해나가는 이 마음 역시 욕심이 드리워진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소 욕심으로 시작한 것 같은 이 수행은 그저 욕심에 머물러 있지 않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수행의 모두가 하나로 이어질 뿐이라고 본다. 물론 하나에 집중하는 이에 비해 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부처님을 불러 늘 깨어있어 불성으로 물들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바른 이해와 행으로 나아가고 다라니를 통해 그 수행이 온전하도록 돕는다면 최적의 수행이 아닐까.

지나고 보건대 처음이라 할 시점에 지장경을 읽은 것이 나로서는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불자로서 가져야 될 기본적인 마음을 지장보살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배웠고 그 1년을 지나면서 근기가 키워졌다 생각한다. 그래서 법화경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법화경을 읽음으로써 유연한 마음으로 법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다 좋다. 솔직히 부처님 법 중에 좋지 않은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법화경, 염불, 능엄주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가끔 초보자라고 하고 불교를 잘 모른다 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기도를 자주 바꾸거나 한꺼번에 여러 가지 기도를 하는 이를 본다. 솔직히 스스로의 근기도 다른 이의 근기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무용한 일이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를 오래 해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 여러 개의 수행을 한다면 그 수행들이 내 안에서 하나의 불성으로 조화를 이루는데 큰 어려움이 없겠다는 생각들 때 하나씩 하나씩 추가해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것도 욕심이 작용하면 좋은 것으로 남기 어렵다. 그러니 이 가장 좋은 기도와 수행을 함에 있어서 내가 어떠한지를 살펴 욕심을 넘어서서 편안함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도,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하나로 돌아가게 하는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