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에 따른 설법이라는 이해가 필요하기도 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식이 잘 찾아오지 않아서 속상한 부모에게 한 스님이 조언하시길 자식이 그런 것을 받아들이라, 다시 말해 자녀에게 효를 바라지 말라는 논조의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20살이 넘기 전에는 부모가 자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단다. 20살 이야기는 나도 잠깐 들은 것 같다. 두, 세가지의 이야기가 섞인 터라 명확하지 않지만 스님의 말을 빌어 효를 말하는 그 사람에게 나는 정색을 하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스님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자기 편한대로 받아들이면 가르치고자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효를 바라지 말라는 논조의 이야기는 자식에게 속상한 부모에게 딱 맞는 조언이다. 바라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떠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가장 필요하고 중하기 때문에 그런 설법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생각해보라. 만약 자녀를 대하여 설법을 한다면 그 스님이 과연 부모에게 효를 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 설법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최선일 수는 없다. 부모에 대한 효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매우 무게있다고 알고 있다. 속상한 부모는 바라는 마음을 떠나야 하지만 자식이라면 누구나 효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만약 스님의 말을 글자 그래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하여, 그러니 자녀는 부모에게 효를 행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든지, 여기에다가 살을 더 붙여 요즘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열심히 사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하면서 그러니 이제 자녀는 부모에게 공양하지 않는 것이 시대의 미덕인양 말한다면 완전한 착각이 되어버린다.
그 자리에서의 법문은 그런 병증을 가진 환자에게 주는 딱 맞는 처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만약 나 역시 그 사람처럼 자식에게 섭섭해하고 바라는 마음이라면 그 법문을 나에게 한듯이 들어야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때에 따라 가져다가 쓰면 될 일이다. 왜? 효는 변치않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자비를 말하는 불자가 부모를 몰라라하고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며 스스로 자비롭다 할 것인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가릴 줄 알아야 한다. 어느 불자가 효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부정할 것인가. 나는 바쁜 와중에도 부모를 향해 마음을 쓰는 자녀에게 드러워질 무량복을 믿는다. 그래서 진정 자녀를 사랑하고 아낀다면 그 자녀의 마음에 부모를 귀히 여길 줄 아는 그런 성품이 배어들기를 기도하고 몸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편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1000미터 고지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이에게 목표를 말한다면 그가 과연 받아들이겠는가.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상황따라 만들어가는 것이 방편이다. 그 방편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1000미터 고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방편이다. 그러니 방편으로 하는 그 법문을 모든 것인듯이 받아들이면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