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대원스님, 공부인의 행리처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8. 13. 10:18

공부인의 행리처(行履處)는 들어도 들은 바가 없고 보아도 본 바가 없어야 한다. 공부인이라면 바깥 경계의 시비장단에 놀아나는 생각이 일어나면 부끄럽게 생각해야 되고, 얼른 화두로 돌려서 공부해서 그 놈이 무너지도록 애를 써야 한다.

공부인은 말이 없어야 되고, 말을 해도 항상 상대방에게 긍정적으로 좋은 말을 해 주는 이런 용심처(用心處)를 써야 공부를 한 선근이 조금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의 허물이 눈에 보이면 공부인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을 귀 밖으로 듣는다면 그는 앞으로 공부할 일이 없고 무간지옥 가는 것 밖에는 없다. 여기(학림사) 와서 정진하고 법문 듣고 하는 인연은 좋지만,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가끔 제목을 보고 대원스님의 글을 읽는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인연은 없지만 글을 통해 마주한다. 오늘 읽은 이 글은 사뭇 나를 돌아보게 한다. 글을 읽거나 상황을 살펴 이런 저런 생각을 적으니 허물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글을 많이 쓰니 말많은 것과 다르지 않고 나에게 적어오는 댓글에 의견을 적고 있으니 시비장단에 놀아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글을 적는다. 바깥 경계의 시비장단에 놀아나는 것은 아직 나의 경계이니 부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과정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으니 유익함으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침묵이 능사는 아니며 표현함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있으니 모든 것을 돌려 좋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면 긍정적인 마음과 말을 쓰는 일이 될 수 있다. 남의 허물이 눈에 보이는 것은 실상을 바라보는 것의 한 측면일 수 있다. 그것으로 사유하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고민하여 좋은 것을 권하고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돌이킨다면 또한 얻을 바가 있다.

글을 읽어 나를 반성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임에 무엇이 유익할까를 다시 고민해보았다. 분명한 것은 수행이 깊어질수록 대원스님의 가르침을 포용한 가운데 걸림없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가끔은 나도 밖으로의 표현을 접고 그저 내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으니 스님의 말씀이 맞다. 그 과정을 제대로 지난 자가 될 때에 참다운 평온과 지혜, 자비에 안주하여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