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할 이유
지장경, 법화경 대범천들의 게송에서 기도의 회향을 배웠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기도의 공덕을 법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고 난 후에 개인적 발원을 한다. 가족과 인연자들을 언급하며 그 삶이 안락하기를 발원한다.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느날 스스로 뒷통수를 맞는 순간을 맞이했다. 가족들 중에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가족이 있었다. 가족 한명 한명을 떠올리며 발원을 할 때 그 가족들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가족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내 마음이 그러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온 세상을 마음에 담겠다는 내가 이들을 축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면 일체중생을 위한다는 내 말은 거짓이다. 밝은 불성은 그런 내 모습이 어리석다고 경책하고 있었다. 그 이후 가족을 축원할 때 그들을 위해서도 축원한다. 물론 축원의 마음이 똑같은 강도가 아니지만 입에 올려 축원할 수 있으니 한 걸음 내디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평등력으로 그저 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가끔 갈등의 구도 속에 머무르게 되는 이들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미워할 이유가 있을까? 전생의 모든 인과를 밝히 안다면 미워할 이유가 있을까? 불성의 자비에 마음이 닿으면 미워할 이유가 있을까? 일체중생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누군가 품지 못하는 이 마음은 거짓된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다. 그러니 미워할 이유에 머물지 말고 불성이 전해주는 자비, 평등, 지혜로 바라보고 싶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아직 멀고 멀었다. 불성에 온전히 머문다면 미워한다는 생각, 사랑한다는 생각조차없이 다만 자비롭게 바라보고 대할 것이니. 미움을 말하고 자비를 말하는 나는 아직 멀고 멀었다. 글을 읽는 그대도 오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미워할 이유에 대해서.
(그래서 하나니르바노들, 당신을 미워할 이유가 나에게는 없다. 아무리 당신이 나를 괴롭혀도. 다만 미숙하여 자비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뿐, 미워할 이유 없음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