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방생, 무엇을 위함인가(2)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4. 27. 14:43

카페에 종종 방생에 대해 글이 올라온다. 어떻게 방생을 할까요? 그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적고 여러 사람들이 읽어 참고를 한다. 불자들이 고민을 나눠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그로 인해 편안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방생에 대해 나누는 글을 보고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작년에도 그러했고 올해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작년에 방생, 무엇을 위함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적었는데 직접적인 표현들이 많아 카페에 올리지 않았다. 올해는 한번쯤은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적고 있는데 어떻게 적어질지 모르겠다. 


살생으로 인한 업은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걱정과 근심, 고통으로 삶을 물들이며 단명에 이르게 한다고도 한다. 그런 이에게 생명을 살리는 방생의 공덕, 그 가피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길 수 밖에 없다. 나역시 그러했다. 귀가 솔깃해졌다. 나도 한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특히 알을 밴 물고기를 풀어주면 좋다고 하는데 나도 기왕이면... 이런 글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불법을 만난 것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철저하게 나의 안위를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건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런 마음이라면 조금 달리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무엇이든 생명을 살리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있으며 선업의 공덕이 깃든다고 믿는다. 그런데 불자라면 생명에 대한 존중, 나를 귀히 여기듯 다른 생명을 귀히 여기는 불성의 자비 한자락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을 위한 방생인가. 나를 위하고 내 가족을 위함인가. 물론 나를 포함한 많이 이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처음이 그러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그러하다면 즉, 나만의 행복을 위해 방생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시작이 그러하다고 해도 불자가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방생이 우리 삶을 얼마나 밝힐 수 있을까, 솔직히 잘모르겠다만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들지 않는다. 


방생은 철저하게 자비여야 한다. 잘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비에서 시작하고 자비로 끝나는 방생을 하라. 그런 방생이라면 잘못되기가 어렵다. 생명을 귀히 여기며 살리고자 노력하는 이를 법계는 귀히 여긴다. 잘못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방생의 효과를 거론하기보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생명을 대하고 방생이라 이름지어 행하는가를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편안하게 돈으로 사서 물고기를 놓아주고 효과를 바라는 그 마음은 자비일까, 욕심일까. 결국 자비를 심은 일은 자비의 결과가, 욕심을 심은 일은 욕심의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왕 하는 방생이라면 자비 가득한 방생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비 담은 방생은 어떤 모습일까. 나도 잘모르지만 생명을 귀히 여겨 그 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무런 조건없이 좋은 마음으로 베풀어주고 발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 그런 방생은 무주상보시에 가까운 최고의 방생이 된다 생각한다.


방생은 물고기를 풀어주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살리는 행이 방생이다. 뭇생명이 잘 살아가도록 마음내어 도와주는 모든 행이 방생이다. 우리는 어떤 방생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방생을 하고 있을까. 작년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방생과 기도가 다를 바 없다 생각한다. 모든 기도가 다 좋지만 기도자의 차이가 있어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가 다르듯이, 모든 방생이 다 좋지만 방생자의 마음과 행이 달라서 드러나는 결과(?)가 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기도하듯 방생하라. 분별을 떠나 마음을 모으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듯 자비를 마음에 담고 그 효과를 생각하지 말고 방생하라. 그런 방생을 온 법계가 기뻐하니 때가 이르면 삶이 평온함으로 물들고 행복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대가 마음에 담는 선한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다. 생각해보라. 조건없이 베푼 선행이니, 악업의 그늘이 사라지면 조건없이 돌아오지 않겠는가. 그것이 이치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