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법화경에서 말하는 인욕은 무엇일까

향광장엄주주모니 2018. 9. 5. 12:05

어느 카페에 부처님 가르침 중 '길을 가르킬 뿐이다'라는 글을 올리니, 어떤 한 사람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길잡이가 길을 잘못 가르쳐준다면 길잡이도 불자니까, 허물을 들춰낼 게 아니라 자비심으로 대하고, 입 꾹 다물고 인욕심을 발휘해야 하는가.

비아냥과 질책이 담긴 그 글을 읽고, 이 사람의 논리는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지만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그런 글을 올린 까닭은 다소 원색적인 어조로 다른 이의 번역을 비판하며 자신의 논리가 맞다고 주장하는 그의 태도가 법화경의 부처님 가르침과 결이 같지 않다고 내가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는 수용하지 못했다.


인욕은 참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참는 것이 인욕인가?

법화경에서 말하는 인욕은 법을 지니는 이가 법을 펼치려고 할 때, 법을 모르는 이가 던지는 온갖 경시와 질책과 괴로힘을 견뎌냄을 말한다.

부처님을 위해서, 법을 위해서, 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몫이 아닌 멸시를 참아낸다.


그가 말하는 인욕이 이런 것인가?

나는 일반 사람들이 거론하는 인욕을 말하지 않았다.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참는 것이라면 그것은 법화경에서 말하는 인욕이 아니다.

단지 자기몫을 받아내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참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욕보다는 수용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내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목적지를 향해 길을 가고자 하는 이가 잘못된 길잡이를 만나 엉뚱한 곳에 도달했다고 생각해보자.

길잡이를 만나는 것, 그의 안내를 받는 것은 그의 몫이다.

각자의 몫이 있음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 더 배울 필요가 있다.

인과, 인연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과의 틀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틀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가.

그 틀을 벗어나는 길에서 우리는 수도 없는 불보살의 자비공덕에 기대지만, 내가 뜻을 세우고 노력하지 않는데 나에게 실현되는 자비공덕은 없다.


목적지가 명확한가?

그 길을 가려고 뜻을 세웠고 늘 그대로 가려고 노력하는가?

그럼 당신은 오래 걸리더라도 힘들더라도 반드시 그곳으로 나아간다.

설령 당신의 근기와 선근이 낮고 작아 잘못된 길잡이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 길을 나아가게 된다.


불자라면 철저하게 자신에게서 답을 찾아야지 남을 탓하는 것으로 답을 찾아서는 안된다.

당신이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만났다면 내가 길잡이를 잘못 만나 엉뚱한 길을 헤멨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정도밖에 선근을 쌓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할 것이고 다시 힘을 내어 뜻을 세우고 길을 나설 것이다. 그 길에 복이 깃들고 불보살님이 함께 한다.

아직 길을 가는 자일 뿐이다. 왜 길잡이에 대한 원망이 없겠는가. 왜 화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과를 알면 알수록 길잡이를 원망하는 것조차 앞날에 어두운 씨를 뿌리는 것임을 알게 되기에 마음을 추스릴 것이다.


누군가 길잡이의 허물을 말해주었다고 치자.

아마도 이 허물 말해주는 일을 댓글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데 허물을 말해주었다고 길을 가는 이가 바른 길잡이를 만난다는 보장이 없다.

왜인지 아는가?

그런 길잡이를 만나 헤매일지 아닐지는 허물있는 길잡이가 있는지 없는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는 자의 업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업이 있어도 우리는 업을 넘어서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환경의 문제가 아닌, 길을 가는 이가 그럴만한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해가 되는가?

아마도 그가 이 글을 읽는다면 길게도 썼지만, 뭔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릴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마음이 닿을 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선근이 없다고, 근기가 낮다고 슬퍼하지 말라.

남들은 하루아침에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많은 선근과 높은 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없다면 낮다면 바로 지금 이순간 쌓으면 된다.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왜 당신은 이렇게 좋은걸 받는 거냐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댓글자여, 내말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살아보니 빨간색은 남들이 아무리 파랗다고 해도 빨갛다.

빨간 색을 빨간 색으로 알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정말 빨간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행해나가야 한다.

알려주는 것과 비난은 다르다.

그 비난이 남들에 대한 경시와 이어져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멀다.

한 마음 잘못 돌리면 법에 대한 공경심은 아상과 교만으로 빠진다.

내가 보니 빨간데, 너는 파랗다고 하니 네 눈깔이 삐었네 한다면 좀 그렇지 않은가?

내가 보니 빨갛다. 네가 파랗다고 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이게 더 부처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빨갛게 보든 파랗게 보든 내가 나아가는 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빨갛다, 파랗다고 핏대를 세우는 일에 시간을 노력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 중요한 것에 마음을 쏟고 싶다.

그가 말하는 논리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 확인해보니 그렇게 핏대를 세울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미 그가 말하는 문제가 나로서는 문제 아니므로.

물론 모든 것은 내 지금의 생각일 뿐이니, 시간을 지나 내일이 되면 어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