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근기품(신해품)의 비유를 생각해보다.
법화경 제4 근기품(신해품), 제자들이 보살들에게 설법하는 것에 대한 의견적은 어떤 글을 읽었다.
그런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나의 이해를 적어보려 한다.
먼저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자라고 하는데 보살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를 말한다. 이건 번역과 상관없는 개념이다. 이 기본적인 개념에서 오류가 생기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논리는 이미 길을 잃는다. 보살 중의 보살이 부처이고 보살이 곧 부처라고 주장하는데 경을 잘 읽어보면 적절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논리를 주장하면 경전 안에서 말이 안되는 상황들을 꽤 많이 마주하게 된다.
법화경이 중생에게 보살되라고 하는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의 뜻은 우리도 부처가 되는 것에 있다고 경에서 밝히고 있다. 법화경 방편품에 부처님이 세상한 출현하는 뜻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중생이 나처럼 되어 내가 더는 불성을 드러내지 않아도 될까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보살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왜 설법회상의 많은 이들(보살, 성문 등)은 부처되리라는 수기를 듣고 기뻐할까. 보살이 곧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살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쓰는 부분이 핵심이다. 글쓴이는 '부처님의 명을 받고 성문제자가 대보살을 가르친다'는 시중의 번역을 코메디라고 언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기품의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어렵게 이해할 부분도 아니다. 왜냐하면 경전만 잘 따라 읽으면 다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먼저 장자는 궁자의 근기가 하열함을 알기에 처음에는 하천한 일을 시키지만, 점차 집의 재산을 관리하게 한다. 그렇다면 궁자는 어떠했는가. 궁자는 처음에는 하천한 일에 만족했고 나중에는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그 중 하나도 가지려는 뜻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시간이 지나 왜 나에게는 재산이 없는가를 생각하기에 이르고 이렇게 마음이 변화한 궁자의 모습을 보고 마침내 장자가 궁자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이야기가 근기품(신해품)의 비유다.
비유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는 이렇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성문제자들은 근기가 하열하여 불지혜가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고 고백한다. 부처님은 그것을 아시기에 궁자의 비유처럼 불지혜를 설하게 하지만 이것이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런 근기에서는 말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열한 근기를 조복한 이들에게 불지혜가 너희 것이 되리라는 것을 밝히신다.
성문제자가 대보살을 가르친다는 것은 글쓴이가 말하듯 엉터리도, 코메디도, 말이 안되는 것도 아니다.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장치이다. 비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라. 장자, 궁자, 재산, 관리, 소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생각하고 부처님, 성문제자, 불지혜, 법을 설하는 것, 불지혜를 얻는 것(부처되는 것)으로 이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인터넷에 보살의 의미로 검색해보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보면 상세하게 보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승불교 보살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다. 보살 중의 보살이 부처라고 말해도 별 상관없지만, 경전을 바르게 이해함에 장애가 되는듯이 보인다. 꼭 한번쯤은 보살이 어떤 의미인지 열린 마음으로 알아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법화경을 다시 읽어보라.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
좋아하면 물들기 마련이다. 우리가 불보살을 부르거나 생각함이 지극하면 그 모습이 비슷하게 변해간다. 부부도 닮아간다. 그러니 경전을 오랜 시간 재미있어서 읽는다면 물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본다. 특히 경전은 살아있는 법 아닌가. 세간의 좋은 책도 오래 즐겨 읽으면 내 삶에 배어들고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오랜 시간 좋아하며 읽은 이가 법을 말함에 불성의 지혜, 자비가 어리지 않는다면 많이 이상할 것 같다. 부처님을 찬탄한다면 부처님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에도 바르게 통찰하여 듣기 좋게 말씀하셨으니 우리도 능력 범위 내에서 나의 고집을 앞세우지 말고 바르게 알기 위해 노력하고 듣기 좋은 유순한 어조로 자신의 이해를 펼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