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제목 부르는 공덕이 가장 크다?(2)
댓글적은 분은 부처님께서 기도를 경전에 따로 남겨놓지 않은 이유를 조심스레 짐작한다고 했습니다. 즉 '경에 나와있는 법화경 비방죄를 우려하신 게 아닐까 싶다. "삳다르마푼타리카"라는 글자에 무량공덕을 남겨놓으신 건 사실이지만 특정 글자만 반복해서 모든 것이 좋아질 수 있다면 글자에 대한 비방죄도 본인에게 돌아올 수 있다고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본인도 말했듯이 경전에 나온 사실이 아닌 짐작일 뿐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니 조금 있다가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아무튼 경에 보면 법화경의 법문 자체가 당시 수행하던 이들에게는 아주 가벼이 여길만한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은 법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에게만 이 법을 설하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비방한 죄로 고통받을 어리석은 중생에 대한 자비로움이겠지요.
법화경은 '부처님은 언제나 계시고 우리는 모두 부처가 된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불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지금이야 우리 안의 불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감히 부처님과 나를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는 전지전능한 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강했으니 우리 모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설법을 들은 이들은 헛소리라 치부했을 겁니다. 너는 이미 부처라고 이야기하면 믿기나 할까요?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이미 법문을 설하는 어려움, 법화법문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방하는 중생들이 받을 비난에 대한 걱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법화법문 자체가 무량공덕을 담습니다. 한 구절 한 게송만 받아지녀도 어마어마한 공덕이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스스로 밝혔듯이 그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조심스러운 짐작일 뿐임에도 다른 공덕보다 제목봉창의 공덕이 가장 크다는 확신으로 타인을 인도하는 것은 괜찮은 갈까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생각이 복잡할 때 상황을 극도로 단순화시키면 판단에 도움이 되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서가 하나 있다고 칩시다. 설명하는 자가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그 사람이 안내하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A를 말하면 A라고 받아들이고 B라고 말하면 B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럽니다. "C가 최고라고 확신해. 설명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만 짐작해 보면 그래."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저라면 설명서를 믿어볼 것입니다. 만에 하나 C가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방법, 아니 더 수승한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내가 설명서를 받아 쥐었고 설명서 작성한 자를 믿는다면 설명서를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설명서대로 되지 않는다면 왜 그런 것이냐고 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큰 의미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 목적을 달성했을 테니까요.
덧붙이자면 특정글자만 반복해서 모든 것이 좋아질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 딱히 반박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만 반복해도 모든 문제가 좋아집니다. 진짜냐고요? 당연히 진실입니다.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그분들은 지금 극락정토에서 높은 수준의 수행력으로 부처가 되어가고 계실 겁니다. 부처님 약속이니까요. 진실하죠. 어디 아미타불 뿐일까요? 모든 성스러운 진언들, 성스러운 존재의 이름은 힘을 갖습니다.
아주 살짝 다른 이야기지만 성스러운 말이 아니라 그저 '코카콜라'처럼 의미없는 말만 반복하면서 집중해도 자성불을 만난다고 주장하는 어떤 분의 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핏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우주 모든 것이 진동이라든지 모든 것이 마음심(心) 한글자로 귀결된다는 말을 심도깊게 사유해본 이라면 그럴법도 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진리는 온 우주에 통해 있습니다. 자기 세계관을 고집할 이유가 딱히 없습니다. 점차 잡혀가는 중심이 있으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충분히 열려 있나요? 혹시라도 중심이 잘못 잡혔있다고 알아채는 순간이 온다면 한순간에 허물어짐을 받아들이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중심을 받치기 위해 이리 저리 무언가를 덕지덕지 붙이는 것보다 그냥 허물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빠를 겁니다.
법화경에서는 오종의 수행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아주 존중했던 어떤 분도 결국 제목봉창으로 결론을 짓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사실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냥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왜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법화경을 근거로 하든 다른 것으로 근거를 하든 아무런 설명도 제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모든 경전의 제목에 경전의 힘이 함축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굳이 반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나무묘법연화경, 나무지장본원본원경, 나무정토삼부경 하는 것에 순응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수행보다 제목봉창이 최고라고 이야기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안내하는 불보살의 가르침도 없었고 개인적 경험도 없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개인적 경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일반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네, 물론 부처님이 경에서 밝히지 못한 다른 많은 것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여주는 것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까요? 또 그것이 하나의 덩어리, 하나의 흐름이 되어버린 법화경의 가르침과 대치하는 논조를 지닌다면 어떨까요? 오히려 저는 그런 의견을 위험신호로 감지할 것 같습니다.
법화경은 방편의 의미를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들의 진실한 가르침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법화경이 최고의 경전이라고 전하지만 동시에 모든 가르침을 아우릅니다. 배타가 아니라 포용, 융화로 이해되므로 하나만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 외의 모든 것을 가벼이 여기거나 부정하는 어조는 아주 많이 이상합니다. 법화경 내내 부처님이 전하신 수행법이 있다면 그것을 지니는 것이 부처님의 뜻에 합당할 것입니다.
촉루품은 법문을 마무리하면서 당부하는 말씀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 부분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 촉루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선남자들이여 그대들도 나를 따르고 본받아 그대들의 주위에 끊임없이 모여들 선남자 선여인들에게 이 여래의 지혜를 아낌없이 보이고 또 방편으로도 보이고 또한 이 법문을 설할지니라.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잘 교화하여 이 법을 받도록 할지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곧 여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니라."
법화경은 불지혜를 이야기합니다. 불지혜를 보이기 위해 그대로 보이든 방편으로 보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방편이 하열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로 연결시킨다면 그대로 정법입니다. 또 법화경은 법문을 이야기합니다. 법을 설할 때 그대로 받아지니는 이들도 있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도 있으니 이들에 대한 교화도 당부하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목 봉창은 법문을 설하고 교화하는 것에 가까운 걸까요? 경전을 읽고 사유함은 법문을 펼치는 부처님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