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해석이 달라도(2)
지난 번에 법화경 해석이 달라도 나름의 공덕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글을 적은 바가 있다. 음...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른 것을 적고 싶다. 무엇이 더 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나와 남을 밝히는 일이 될지, 흐리는 일이 될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할 것이며 이것은 쉽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잣대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무엇으로 인해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또 부분은 서로 조화를 이뤄 하나의 큰 흐름 안에서 흘러가야 한다. 상충이 있더라도(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충이더라도) 서로 포용이 되는 상충이어야 한다.
법화경에 나오는 여러 구절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많은 경우 우리의 선업, 선근이 작용하여 지금의 우리가 이러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모든 순간 부처님의 뜻, 가르침 안에 머물기를 간청하고 그것으로 나아가길 간청하면서 선업을 부지런히 쌓아가야 한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면 내면이 밝아져서 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 누구라도 자신을 믿어 내세울 교만할 틈이 어디 있을까. 나만이 옳다고 믿는 자가 스스로 돌이키지 않고 그 태도에 갇혀 부지런히 걷는다면 실상을 깨칠 날은 멀어질 것이다.
법화경은 어떤 경인가.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누군가 설했다면 그 설함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항상 그런 청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뜻대로가 아닌 부처님의 뜻대로 알기를 원했다. 잘못된 이해라면 아까워하지 않고 다 던져버린다는 생각을 억지로라도 해왔던 것 같다. 나를 주장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출현한 부처님의 그 목적을 이루는 것에 내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체의 부처님들처럼 내 부처님의 개별화된 색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근본 뜻에서 다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늘 법화경을 대하여 나름의 사유를 하지만 그 또한 불성이 이끄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래왔던 것 같다.
법화경에 관한 여러가지 행이 무량공덕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 행이 정말 그런 행인가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동반되어야 편안한 일이 될 것 같다. 개인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