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보라
사람이 잘못한다고 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스님이 잘못한다고 불교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못된 점을 고치고자 하고 말하고자 할 때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근본이 흔들린다. 법은, 불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것을 따른다고 하면서 잘못 이해하고 행하는 사람들의 허물일 뿐이다.
오늘 카페를 둘러보니 보살의 의미에 대해서 적은 글이 있었다. 사실 읽으려고 한 것이 아닌데, 그냥 열렸다. 읽어보라는 것 같았다. 내가 이런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명확한데 굳이 목록만 열어둔 상태에서 글이 열리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을 적어도 될 것 같다. 며칠전에 이 사람의 의견과 관련된 글을 블로그에 적어서 저장하려는데 인터넷이 갑자기 끊겨있고 저장에 오류가 발생했었다. 다음날인가는 법화경 카페에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이 사람과 관련될 수 있는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또 다른 오류가 일어났다.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 너의 허물이 될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법계의 메세지로 받아들였는데 오늘 블로그에 글이 등록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적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대강 이렇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을 가볍게 여긴다. 현대 불교계에서 여자 신도를 보살로 칭하니 보살이 별 것 아닌듯이 이해되고 있다. 내가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곧 부처라고 말하면 불교 좀 안다는 이들이 나를 한심한듯 바라본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이렇게 보살을 부르며 기도 열심히 하면서 정작 보살을 경시하는 풍조가 개탄스럽다.'
그의 글이, 생각이 많이 아쉽다. 여신도를 부르는 보살과 지장보살에 붙은 보살이 같다고 하면서 보살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한다면 좀 이상하다. 밖을 비판하면서 보살을 말하고 싶다면 보살에 대해 알아보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많이 알아봤을 것 같아서 이런 글이 의외이긴 하나 상당한 기간 이런 논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궁금해진다.
나는 보살을 별도로 공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만 읽어도 뭔가 여러 경지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지장경에는 인연의 자리를 뛰어넘어 십지에 올랐다고 지장보살을 찬탄하는 구절이 나온다. 십지가 높은 경지라는 것을 글의 흐름에서 추측할 수 있다. 법화경 서품에는 불퇴전이요 남은 한 생에서 무상정등각에 이르는 보살들, 우리가 잘 아는 관세음, 문수, 미륵보살 등 많은 보살들이 나온다. 다음 생에 부처되실 높은 경지의 보살들이다. 또 이제 막 보살승에 올라 법화경 법문을 듣고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보살들도 나온다. 이제 막 보살된 자들이다. 다 보살이다. 덧붙이자면 불지혜는 불퇴전 보살도 이해못하지만 원력이 높은 보살들은 이해한다고 했다. 이처럼 높은 경지도 그 수준이 다 다르다.
배운 것을 적어보면 보살은 일지에서 십지의 10단계로 나눌 수 있고 초발의에서 일생보처의 4단계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더 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말하면 나는 보살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초발의보살, 초발심보살이다. 나도 보살이고 관세음도 보살이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같은 길로 들어섰지만 경지가 다르다.
이렇게 보면 불법에 인연이 있어 사찰에 들고 나는 여자신도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다. 깨달음에 뜻을 둔 자라고 확대하여 해석하거나 또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원을 담아 부르는 호칭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맞는지 틀리는지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 사실 말하기도 어렵고 이것을 중요하게 논의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용어의 잘못된 활용이 불교 가르침의 근본을 흐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살이라는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불교계에서 나이 든 여자, 또 세속에서 여자 무속인까지 지칭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 사용함으로 인해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었다고 걱정된다면 먼저 올바른 의미를 알아보고 그런 연후에는 스스로 바르게 쓰고 다른 이가 제대로 알고 쓰도록 힘쓰면 되지 않을까 싶다.
대승불교가 보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글쎄다. 앞선 이야기들과 비슷한 흐름이 되겠지만, 용어의 잘못된 활용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세태를 가지고 보살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면 부분, 그것도 본질을 벗어난 부분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오류에 빠진다고 본다. 분명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보살을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헷갈려 할 수 있지만, 차라리 경전에서 말하는 보살을 별도로 보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 어떤 사람도 그가 말하는 곧 부처될 보살들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 말대로 부처에 준해 공경, 찬탄하는 대상인데 어떤 대승불교에서 보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인가.
차분히 생각해보라. 관세음보살이 곧 부처라고 한다면 동의할 것이다. 내가 부처라고 한다면 똑같은 강도로 동의하겠는가? 보살이 부처라고 한다면 이런 별볼일 없는 나마저 부처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는 초발의보살이기 때문이다. 동의못한다고 한다면 스스로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상한 모습이 된다. 보살이 곧 부처인 경지도 있지만 한참 닦아야 부처인 경지도 있다. 스펙트럼처럼 넓게 분포된 그 모든 보살을 보살로 받아들여야 제대로 단추가 꿰어지듯 두루두루 편안하다. 그게 진실이니까.
법화경이 보살이 되게 하는 경이라는 주장을 하다 보니 보살이 곧 부처라는 주장까지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수준에서 알법한 말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 반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걱정스럽다. 잘못된 앎이 신념이 되기 시작하면 무서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바른지 그가 바른지 누가 알까? 부처님만 알 것이다. 일들이 어떤지 어떻게 돌아갈지. 다만 부처님의 음성을 그대로 듣기 바라는 원이 있으니 오늘이 잠시 어긋나도 다시 바른 길로 들어서리라 믿고 소망할 뿐이다. 모든 불자가 그러할 것이다. 그 길이 너무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보살은 귀하다. 그렇다고 보살이 부처는 아니다. 결국 부처되겠지만 보살은 보살, 부처는 부처다. 보살이 부처라면 왜 보살이 부처되는 원을 세우고 수행을 할까? 헷갈리는 지점이 무엇인지 짐작은 되나, 그렇다고 보살이 부처라고 하면 글쎄. 답하지 못할 것들이 많이 생긴다.
보살은 경전에서 말하듯 귀하다. 불국토의 보배라고 했으니 보배처럼 귀하다고 보면 맞다. 사람들이 달리 보살이라고 부르는 대상들이 별볼일 없다고 해서 경전의 보살들이 가벼워진 듯 말한다면 적절하지 않다. 차라리 이 보살과 저 보살이 다르다고 말해 주장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