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불교가 리버럴하다는 말

향광장엄주주모니 2018. 12. 11. 09:07

법화경 카페에 들어가니 남묘호랑게쿄에 대한 질문을 올린 이에게 한 사람이 답글을 올렸다. 며칠전에 이미 나역시 그에 대한 글을 올린 상태였다. 예전에 법화경에 대한 질문 중에 남묘에서 이렇게 주장하던데 이게 맞냐는 글들을 읽은 적이 몇차례 있었고 법화경의 어떤 부분을 검색하다보면 그 쪽인 듯한 사람들이 올리는 답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평소 생각했던 부분을 적어 내 능력 범위내에서 궁금증과 혼란을 해소해주고 싶었다. 사실 아상일 수 있으나,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빌어 잘못된 사고의 틀을 깨어주고 싶었다. 가르침을 바르게 마주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답글을 올린 사람은 자신의 주장과 어긋나는 나의 글에 늘 비꼬는 댓글을 달았고 논쟁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법화경에 있다는 내말에 법화경의 전개모습이 부처님과 보살의 논쟁 등 논쟁의 모습으로 나온다면서 마치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놀려먹듯 무식하고 저열한 사람을 대하듯 나를 갖고 놀려 했다. 처음에 몇 번 글을 읽었는데, 지금으로서는 크게 취할 바가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이후로 글을 읽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끔 내 글을 읽는지 변하지 않는 태도로 댓글을 달았다. 마지막 댓글은 전도된 마음에 달린 '똥물에 밥이나 말아 먹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그 순간에도 이 사람은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머물러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제목을 보고 궁금해졌다.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변화했는가가 궁금해졌다. 그의 글은 이랬다. 불교는 리버럴한 종교이므로 남묘호랑게쿄가 옳은지 그른지 논란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의미없다는 것이었다. 오~~~했다. 늘 비판하고 논쟁하는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왔던 사람 아닌가. 평소 글의 논조와 완전히 달랐다. 변화가 느껴졌다. 자신을 내세우고 남을 가멸차게 비판하는 예전의 그 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글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잘 읽었다는 진심의 댓글을 달았다. 글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좋아요를 눌렀다. 글에서 다시 나왔는데 뭔가 찜찜했다. 리버럴해서 시비를 가리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진짜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괜찮은 듯 하면서 뭔가 미묘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다시 들어가 좋아요를 취소했다. 그리고 카페에 그 지점에 대해 새로이 글을 적으려는데 가끔 발생하는 오류가 발생했다. 여기 지금 적지 말라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블로그에 들어와 글을 적고 있다. 이 글 자체가 의미없다면 유익이 없다면 아마 저장시에 또 오류가 발생할 것이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요즘 그렇다. 나만이 알고 느끼는 그런 것이 있다.


나와의 교류를 통해 그 사람도 생각을 달리 했으면 좋겠다는 원이 있었다. 내가 맞으니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글을 읽고 나와 달리 말하는 부분이 정말 그러한가를 경전을 앞에 두고 고민하듯 다른 말을 하는 나의 글을 읽고 정말 그러한가를 한번쯤은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계속되는 비난과 조롱으로 화가 나기도 했고 가끔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다행히 그가 읽으면 살짝 열받을 그런 글을 올려도 한동안 잠잠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글, '전도된 마음'에 댓글이 달린 것이었다.


너무 길게 적었는데 그의 말처럼 불교는 리버럴하다고 볼 수 있다. 단순화시켜 말하기 어렵지만, 나는 부처님의 설법 방식을 말하고 싶다. 법화경을 읽으면 좋은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깊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말씀을 왜 하신 것인지, 부처님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불성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법화경을 읽으면 이것만이 좋다는 말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지지만 그 길에 이르는 이들에게 만나지는 법은 사람마다 근기따라 다르다. 근기따라 설법하는 부처님의 자비와 힘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 여러가지 법을 말할 때 이것만이 라고 말한다면 아직 부처님을 잘모른다고 말할 것 같다. 팔만사천의 법문을 생각해보라. 근기따라 설하신 법이다. 법이 다양하게 펼쳐진 것은 중생을 포용하는 부처님의 자비이다. 단순히 리버럴하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된 근본을 놓친 아쉬운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좋은가를 비교하는 것은 일반적이 아닌 개인의 문제가 된다. 내가 어떤 근기의 사람인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지금 나에게 더 적절한 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법을 배워서 시작이 되면 모두가 만나게 되는 그 길에 나도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이다. 다 정법이지만 결국은 질러가든 이리 돌아가든 저리 돌아가든 다 한곳으로 나아가겠지만 그래도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다. 정말 표현하기 어려운데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무용하나, 필요한 지점 또한 분명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제목봉창만이 효과있고 지금 시대에 다른 수행법은 효과없다고 일반화시킨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이곳에만 법의 맥이 흐르기 때문에 여기 아니면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 방편으로 어떤 이를 법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그 방편이 효과있을 때까지는 괜찮다고 하겠지만 이미 법으로 인도되었다면 방편이 아닌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굉장히 좋게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듣기에 그런 주장들이 방편이 아닌 신봉해야 할 진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리버럴해서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는 것은 의미없다는 말은 사실 미묘하게 위험하다. 리버럴하다고 표현될 수 있는 만큼의 포용력과 자비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옳은지 그른지 가려야 되는 순간이 분명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면 너무 멀리 돌아갈 수 있다. 돌아오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가릴까? 철저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가려야 한다. 법화경을 말한다면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충분히 새기고 나서 답을 구하는 것이 맞다. 내가 아는 작은 부분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기에 어쩌면 내가 더 큰 진실을 가리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이 최후로 설하는 가장 귀한 경, 방편을 버리고 진실을 설한 경인데, 이 경을 다른 무엇으로 가릴 수 있다는 말인가. 법화경을 바르게 받아지니고 가르치신 대로 수행하는 것에 외에 더 붙일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부처님의 법을 부촉받아 설하는 대법사라면 법화경 가르침을 뒤집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법화경 어느 곳에서도 말세 말법시에 제목 봉창만이 효과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비를 분별을 떠나야 하지만 밝게 알아지는 순간이 되면 분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냥 알아진다. 맛을 극히 조금 보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느끼기에는 그냥 명확해질 것 같다. '이것은 불성의 자비, 지혜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드러날 것 같다.

 

내가 바르게 수행하는가 아닌가는 철저하게 내가 어떠한가에 의해 가려진다. 그런데 함께 하는 이들을 살필 필요성이 있다. 가까이 하면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나누겠다, 좋은 것을 배우겠다는 좋은 뜻으로 시작해도 견고하고 바르지 않으면 휩쓸리게 되고 휩쓸게 된다. 그러니 혹시라도 가까이 하는 무리를 만들게 된다면 정말 바른 무리인가에 대한 바른 분별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내가 부처님을 법을 바르게 배워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점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