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사람
누군가 한창때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잘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참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현재의 삶에 대해서 지금같은 생각과 태도를 고수한다면 좋아질 것이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들어간 노력이 없으면 좋아질 것을 기대할 바가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며, 이번 생이 끝난다고 갑자기 별세계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면 좋아지겠지라고 기대할 수 있는데 이번 게임에 남은 게임머니가 새로운 게임에서 그대에게 주어지는 전부라고 보면 된다. 생각해보라. 새 게임을 맞이하더라도 밑천은 떨어져 있고 선수의 기술이 하나도 변화하지 않았는데 웃을 일이 있겠는가.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나를 웃게 만들 수 있다.
스스로 말하길 왜 경전을 읽고 왜 염불하는지 모르겠는데 부처님 가르침에는 그래도 의욕이 있고 놓고 싶지 않다고 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자신의 깊은 속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뭔가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냥 살다가 편하게 죽기를 바란다고 하는데 그 내면에는 밝아지고 싶고 참다운 행복과 평안을 누리고픈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위해 설하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말이다. 그런 마음이 있음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나는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답답한 마음에 나누고 싶고 어떤 해답을 찾고 싶은 생각에 자신의 상황을 피력하는 것이겠지만, 결국 나를 움직이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결정이다. 아무리 등을 떠밀고 온갖 말을 하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힘은 나에게 있지 남들이 제시하는 답에 있지 않다.
불교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라는 이상한 논리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허무를 넘어선다. 허깨비같은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 나투시어 자비로 중생을 교화하신다. 허무가 불교라면 우리가 부처님 만날 일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착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발원한다고 하는데 애착과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육신은 애착할 대상이 아니다. 변화하는 것이며 곧 허물어질 것이다. 이것이 영원할 듯 마음에 담아두고 중히 여기기 시작하면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게 애착이다. 그렇다고 곧 허물어질 육신이니 하면서 방치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도 맞지 않다. 이 육신에 힘입어 이번 생을 살아갈 수 있으니 감사하고 귀히 여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것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는가? 이유없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그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모른다면 찾으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고 찾았다면 그에 따라 삶을 잘 살아가야 한다. 육도윤회도 괜찮고 더 비참한 삶도 괜찮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다. 그런데 스스로 발원하길 삶의 애착을 벗어나게(아마도 평온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위에 말했듯 이것이 허무주의와 이어진다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 윤회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다니 밝고 편안하며 고통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그러니 경전읽고 염불하며 내 불성이 무엇을 말하는지 지극한 마음으로 들어보라.
잘 모르겠다고 낙담하지 말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처음에는 덮일대로 덮여 잘 알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덮인 것을 사라지게 하는 노력을 하면서 천천히 찾아나가라. 경을 읽고 염불하고 하루에 한가지라도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서 행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웃는 얼굴 보여주기, 밝은 말 하기, 쓰레기 줍기, 청소하기, 나를 정결하게 하여 보는 사람이 기분 좋게 하기, 집에서든 거리로 나가든 그 어떤 상황에서든 도움 줄 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 이렇듯 경전을 통해 바른 가르침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염불하여 불성을 일깨우고 선한 일을 실천해나가는 삼박자가 갖추어지면 덮인 것들이 점차 사라진다. 삶의 의미를 바르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며 어렵게 만난 시간이다.
지금 죽으면 무엇이 남을까. 행해온 업이 남는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쌓고 있는 업은 선업에 가까울까, 악업에 가까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