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탄할 때에는 누구나 좋을 수 있다.
순탄한 때에 험한 언행을 짓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떠한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순탄한 때에 유순한 언행을 짓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떠한지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다.
순탄하지 않을 때에 험한 언행을 짓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순탄하지 않을 때에 유순한 언행을 짓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순탄한 시절에는 그 누구라도 편안할 수 있다.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보기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은 시절에는 그 누구라도 편안하기 어렵다.
그러니 순탄하지 않은 시절을 만나야 사람이 참으로 어떠한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위 4가지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고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지, 각각의 상황으로 들어가면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
호시절이든 악시절이든 나름의 의미를 갖는데, 수행자에게 악시절은 수행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 과정을 겪어나가며 나를 닦을 수 있고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어떠한지 알아차릴 수 있다.
가정에서, 모임에서, 또 온라인에서 만나는 여러 상황들은 그야말로 나를 알아차리고 닦는 기회가 된다.
그렇기에 잘 살아나가다보면 어느날 문득 동일한 상황에서 달라진 생각을 하고 언행을 보이는 나를 알아차릴 수도 있다.
내 이야기를 조금 적자면 처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새기면서 억지 유순함에 나를 밀어넣기도 했다.
아는 것을 실천하라고 하니 그래야만 했다. 마음과 생각이 따로 돌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 커서 생각이 닿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속까지 그런 사람 아니니 가리고 참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을 만나면(누군가 던져주면) 여지없이 폭발하거나 무너졌다.
그런 일이 생기면 역시 내가 그렇지라는 자조에 빠져 한동안 법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불을 떠나면 희망없다는 무의식에 의해 다시 불법을 보고, 가르침을 봤다.
그리하여 다시 생기를 찾게 되고 허물어진 나를 추스리며 다시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그랬다.
불법을 만나고 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 이런 수행의 과정 속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예전과 달라진 나를 만난다.
억지로 가린 것이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그러하여 크게 힘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측면이 있다.
100은 아닌데 그것이 1일지 10일지 30일지 50일지 70일지 나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수행중이다.
나도 중생심이 있으니 악시절이 좋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까지 객체로 바라보려는 노력하면 진실에 가깝게 알 기회가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며 자기마음 다스리는 노력하면 언젠가 달라진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수행이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을 알아차리고 닦아가는 삶, 즉 살아가는 이 과정이 수행이다.
그런 수행의 날이 쌓이면 누구나 변하지 않을까.
오늘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열린 수행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날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