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함, 시작일 수 있지만 머물 곳이 아니다.
신묘한 현상들, 나도 엄청 관심있었다.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 카페, 저 카페를 돌아다니면 신행수기들을 읽었던 시절이 있다. 멀지도 않다. 2015년이니 3년 전이다. 광명진언부터 시작해서 지장기도, 관음기도, 법화경, 여러가지 다라니들. 수도 없는 사람들의 수행담들을 읽으면서 '아, 어떻게 하면 저럴 수 있는거지?'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었다.
그것을 보고 광명진언 21일 기도를 시작으로 나름의 수행이 시작되었다. 한동안은 전혀 반응이 없는 것 같은 수행에 지치기도(?) 했다.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내가 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신묘한 현상들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는 경만 읽으면 하늘에 뭐가 뜬다는 둥, 경에 사리가 나온다는 둥, 촛불이 이상하게 된다는 둥 하는데 1년을 법화경만 읽어도 어떤 특이한 현상이 없었다. 지장경을 읽어 이기적인 마음이 변화되었고 법화경을 읽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랬다. 그 때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나는 신묘한 현상이 없어도 불법을 배울 수 있는 자라 그런 거야.' 정말 그러하긴 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 늘 불안감이 존재했다.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까, 혼자만의 사랑은 아닐까? 그러던 어느날 꿈을 꾸었다. 부처님 형상이 나타나거나 코끼리가 나타나거나 하지 않았지만 현대적이고 일반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 부처님은 불안해하는 나를 위로해주셨다. 부처님은 꿈을 통해 '너 지금 아주 잘하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꿈에서 사무실 막내였던 나는 원래 들어갈 자리가 아닌데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 집단의 장이 내린 평가를 받았는데 네 가지 분야에서 96점을 받았다. 꿈에서도 굉장히 좋은 평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숫자가 정확한지는 가물가물하다. 맞을 거다. 그리고 평가서들이 넘어가는데 이런 글을 보았다. '인간의 글 중에 이렇게 잘 정리된 글을 본 적이 없다.' 그 파일철에 언니의 얼굴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그 평가가 나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이렇게 글을 쓰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당시 아침에 산책을 할 때마다 염불을 하면서 부처님을 대상으로, 또는 스님이나 지인을 대상으로 법에 대해서, 상황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혼잣말처럼 해나가고 있었다. 마치 글을 써나가듯. 그 이후로도 가끔 꿈을 꾸긴 한다. 부처님인가보다 하는 꿈. 중년의 아줌마가 나오기도 하고 아저씨가 나오기도 한다.
그 이후 신묘한 현상들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늘 부처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춰 법을 펼치는 부처님일진대 다른 이에게 맞춰 펼쳐지는 상황이 꼭 나의 상황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과거의 나처럼 혼자만의 짝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불안한 이가 있다면 안심하라. 문제는 내가 법을 제대로 배우려고 하고 정진하고 있는지의 문제일 뿐, 그것이 갖춰지면 최상의 길에 이미 들어서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불법은 그런 것이니까. 살아있고 반응한다. 부처님은 지금 처처에 생동하고 계신다.
이야기가 살짝 옆길로 샜는가? ^^ 글을 이리 저리 살피다 보면 신묘한 현상에 너무 오래 깊이 빠져있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신묘함은 부처님 법으로 들어가게 하는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너무 오래가고 커지면 글쎄,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법화경에서 묘장엄왕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부처님이 허락하신 신통력을 보임으로써 사견에 빠진 아버지가 불법으로 마음을 돌리게 한다. 마음을 돌린 아버지가 한 일은 그 현상에 빠져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에게 법을 듣고 나서 스스로 정진하여 가르침을 외우고 사유하고 통달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신묘한 현상인가? 법인가? 신묘함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불도로 이끌었다면 다음에는 합당한 법을 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묘함으로 법에 들어왔다면 이제는 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가르침을 들을 마음을 가져야 한다. 참다운 기쁨은 거기에 있다. 사라지지 않을 무량한 복이 거기에 있다.
법을 설함도 신묘함으로 일관된다면 좀 이상하다. 부처님의 뜻은 불자가 신묘한 현상에 감동받는 것에 있지 않다. 바른 법을 배워 부처님의 지혜에 다가가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 참으로 바라는 것이다. 물론 미묘하기는 하다. 앞에서 말한 일련의 상황들이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신묘함과 연결된 지점들이 있고 그 자체로 의미가 분명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면 신묘한 현상이 일어나서, 가피가 있어서 너무 멋지지 않냐는 감동의 순간을 넘어선 다음 단계가 있어야 한다. 법을 많이 알고 부처님을 깊이 사귄 이라면 능히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불법에 귀가 솔깃해지고 마음이 돌아온 이에게 우리는 무엇을 펼쳐보여야 할까?
나도 좋아한다. 신묘한 현상. 그것에 의해 처음 부처님 법문에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 마음이 돌아왔고 시작이 되었다면 다음 과정을 밟아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문 밖에 서있는가? 문 안으로 들어왔는가? 문 밖이라면 마음을 움직일만한 현상들을 더 많이 보고 보여줘도 괜찮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왔다면 이 불법의 세계가 무엇을 위함인지 그것을 알아보고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늘 하는 걱정인데 그저 나의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정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정답이기도 한 그런 일이니. 누군가에게 좀 더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한 참고가 된다면 좋겠다.
진실로 말하건대 나도 신묘한 현상에 관심 있다. 그래도 그것의 비중이 커지면 가는 길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허니 최적의 수준에서 활용할 수 있기를 부처님 앞에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