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이 지켜주지 않으니 추천한다는 공왕불기도
상담게시판 댓글로 적은 글에 자신이 하는 기도를 주장하면서 글적어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생각하고 나눌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적어봅니다. 가볍게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도해도 신중이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니 공왕불기도를 추천한다고.
일단 전제가 바르지 않다 생각드네요.
신중은 바르게 부처님 법을 따르는 불자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불자를 지키는 신중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불보살과 선신, 신중의 옹호를 받지 못했다면 그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기도하는 불자는 온 법계가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옹호를 받지 못할 리가 없다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없다고 모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있고 다른 이들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제가 바르지 않으니 그 이후는 재고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적어보겠습니다.
이어서 말하길 현존하는 기도 중 가장 강력하게 운명과 팔자를 바꾸는 기도라고 하네요.
누구의 말일까요? 일단 법화경에 그런 기도수행법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현존하는 기도 중에 가장 강력하게 운명과 팔자를 바꾼다는 말 역시 찾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법화경을 통틀어 말세 말법시 후오백세까지 오종의 수행을 말씀하십니다.
'경전 이름을 받아지는 것'은 다라니품에 한번 언급됩니다.
'나무묘법연화경'을 공왕부처님이라 명명하고 부르는 그 기도는 어디에 나온 누구의 가르침일까요?
그것이 어떤 가르침이든 법화경의 가르침을 훼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종의 수행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불법 안에서의 작은 선업과 수행도 공덕으로 복을 이루며 인생을 밝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주장은 그대로 진리가 되기 어렵습니다.
각자에게 더 적합한 최선이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신기를 많이 말하니 신기로 말해볼까요?
어떤 이는 경을 읽으면서 신기 거세져서 힘든 고비를 넘어가지 못했다고 하고 어떤이는 경을 읽으면서 업장이 소멸되고 복덕이 증장되며 지혜가 밝아진다고 합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두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다릅니다. 전에 지은 업이 다르며 그래서 근기나 성품 등이 다릅니다.
그래서 만나는 법이 다릅니다(물론 하나로 이어지는 법이니 결국은 다르지 않지만요).
그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읽어 유익함을 얻는 금강경, 부처님의 경전들을 자신이 못읽는 것 뿐입니다.
자신이 못한다고 다른 이들도 못하리라 생각하면 과도한 일반화가 됩니다.
부처님을 따른다는 생각이 명확하다면 경전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워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도 제 근기만큼 보는 것이니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지만, 부처님 법으로 유익함을 이루고자 한다면 바르게 배워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글을 다시 적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최선은 아닌 것 같아서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