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싫을 때가 있다.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3. 29. 18:35

가끔 사람들이 건네는 음식물이나 물건을 받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좋지 않은 마음이라 느껴져 싫을 때가 있고 물건을 건네는 마음이 아무리 호의라 해도 불편하게 느껴져 싫을 때가 있다. 그런 물건을 취하고 싶지 않아 가끔은 받지 않거나 받은 후에 다른 이에게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누군가 각각의 뜻을 가지고 나름 베풀려고 할 때 좋든 싫든 받아주는 것도 불자가 지녀야 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좋지 않은 마음을 감추고 준다고 느껴질 때에는 제외한다. 잘은 모르지만 독기가 가득할테니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더 자세히 적을 일은 아니다. 그런 경지 아니므로. 그런데 예전에 도를 공부하는 단체에 속해 잠시 머물 때 윗어른에게 올리는 음식을 만들 때에는 정성된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보기에는 어른이 음식을 맛있게 먹은 것은 음식의 기술에 있지 않았다. 어떤 마음으로 조리했는지에 따라 음식을 맛있게 먹기도 했고 겉으로 멀쩡한 음식에 별로 손대지 않기도 했었다고 기억된다. 아마 공부의 경지가 높아지면 그냥 알아차렸을 것 같다. 그 음식에서 조리한 이의 마음을 말이다.


어제 합창단에 새로운 단원이 3명이나 왔다. 우리 파트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분이 지인들을 모시고 와서 파트마다 한 명씩 들어가게 되었다. 파트에 단체톡방이 있는데 새 단원을 초대하면서 연습할 때의 자리를 뒤에 둘지 앞에 둘지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 나도 어떤 의견에 대해 동의한다 말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처음 꺼난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들에 다소 딱딱한 반응을 내보였고 또 그 반응을 누군가 받아쳐서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갑자기 다음주에는 연습을 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냥 이런 탁한 분위기가 싫었다. 그 분위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같이 웃는다한들 진심일까. 하나의 마음으로 음성공양이 될까. 잠시 그러했다. 그러다가 또 생각들길 이런 곳에서 내가 할 바를 다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다. 보살은 떠나는 이가 아니라 들어가는 이다. 물론 때에 따라 들고 나야 할 순간이 있겠지만 흐리다면 내가 청정하여 그 흐린 것을 조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면 그걸로 불자의 일을 하는 것 아닐까. 냉랭하여 대화 끊긴 카톡방에 다들 짱이라는 이모티콘을 올렸다. 다른 분이 받아 서로 단원을 생각하는 마음이니 다 잘될 것이라는 글과 웃음만발한 이모티콘을 올려주었다.


가끔 싫을 때가 있다. 그래서 떠날 때도 있고 그래서 머물 때도 있다. 그런 순간에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불자의 지혜일 것이다. 나는 그 지혜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것인가로 고민했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의 말처럼 일단 부처님의 법으로 수행을 해보고나서 물을 일이다. 착각일지 조금은 맛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어나고 알아지고 느껴지는 그 마음이 아마도 밝게 알아가는 아주 아주 초입의 맛일지도 모르겠다.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무엇을 함이 최선일까. 보살은 머물까 떠날까. 머물러 무엇을 할 것이며 떠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공부와 수행은 일상을 통해 완성된다.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공부한 것을 실전에서 증명해야 살아있는 공부로 완성된다. 아마 경전을 읽고 생활을 하는 것이 그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앉아서 머리로 알아차린 것은 깊은 사유를 통해, 또 오늘 내가 속한 생활을 통해 증명되고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