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아는 체 마장, 마장(?) 떠난 이야기

향광장엄주주모니 2018. 12. 13. 09:28

종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알아차리게 된 나의 깊고도 깊은 업장이 세 가지 있다. 어마어마하게 많겠지만 내가 알아차린 깊은 업장, 이것이 포인트다. 그 중 하나가 교만한 마음이다. 재수없어하지 말기 바라면서 말하자면 머리를 써서 이해하는 일을 좀 잘하는 편이었다. 창조적인 일이 아니라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들을 남보다 좀 잘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의견이 다르면 나를 주장했고 다른 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겉으로 고개를 끄덕일지언정 속으로는 그래도 내 말이 맞다고 말했다. 모르면서 아는체하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아는체의 말을 많이 했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대화 중에 '나는'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친하게 지내던 이가 말버릇, 특징으로 얘기해준 것이 '나는'이었고 듣고서야 그래왔음을 알아차렸다.


기도하면서 하는 발원들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늘상 기본적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변화되는 것들이 있다. 그 변화되는 것 중 한동안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거짓되지 않고 진실하고 정성된 마음이기를 늘 발원했었다. 오랜 시간 그런 발원을 하며 경을 읽고 염불도 했을 것이다. 교만도 거짓도 정성없음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중 가장 두려운 것은 교만이었다. 교만으로 닿을 수 있는 불법은 없다. 교만으로 밝힐 수 있는 세상은 없다.


어느날인가 꿈을 꾸었다. 무의식이라 하든 내 안의 부처라 하든 내 밖의 부처라 하든 그런 작용들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장소에 있었는데 만화에 나옴직한 길쭉하게 생기고 잘차려입은 남자가 아는체의 말을 마구 지껄였다. 예를 들어 안경을 말하면 안경은 84개의 종류가 있는데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하는 식의 말들이었다. 약간 의기소침한 내색, 살짝 잘난체 하는듯한, 흔히 우리가 잘아는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나 잘났어요~하는 그런 분위기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 이 사람이 떠나가려는구나를 알아차렸다. 너무 섭섭하고 아쉬운 감정,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꿈을 깼다.


만감이 교차했다. 마가 떠나갔구나. 잘난체하고 아는체하는 마가 떠나갔구나. 그 마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었고 익숙해진 존재였기에 떠나는 것이 섭섭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떠났구나. 내가 교만을 알아차렸을 뿐만 아니라 늘 겸손하기를 발원했기에 더 이상 내 안에 머물 수 없게 됐구나.


그 시기에 그런 꿈들, 마라 생각할 존재의 모습이 나타나는 꿈을 몇차례 꿨다. 언젠가는 나를 툭툭 건드렸는데 마음에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기에 이제 이 마는 나에게 영향력이 없구나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들은 대개 친밀한 이들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간혹 언니의 모습이기도 했고 오래전에 헤어진 죽마고우의 모습이기도 했다. 무심하기도 했고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세가지의 업장 중 두가지는 꿈을 통해 떠나갔음을 알았다. 남은 한가지는 아직도 꿈의 상황을 통해 마음 돌이키라고 너 여전히 이러하다고 종종 표현된다. 그저 나의 경험, 이해,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마가 떠나갔다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려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너무 익숙하여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의 피붙이처럼 밀착되어 있는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또 떠났다고 모든 상황이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견고하여 무엇에도 물들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안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어제 올린 글에 교만이 느껴진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표현들은 쓰면서도 이렇게 느낄수도 있음을 생각하며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염려하며 썼다는 것에 마음이 닿는다면 그저 교만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찜찜함을 느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교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교만과 결이 좀 다르다. 떠나고 싶어 고민하고 발원하여 가벼워진 내가 다시 그  어리석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오랜 습으로 문득 그러한가를 순간 순간 고민하는 수준일 뿐이지만 많이 걸어나왔다고 생각한다. 

교만은 두렵다. 하지만 안심하고 있다. 내가 알아차리고 있고 알아차리려고 늘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교만의 습이 다시 머리를 들어도 오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다음에 한번 기회가 된다면 글로 적고 싶다. 내가 예민해하는 부분, 그래서 남들에게 더 많이 보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표현하기가 간단하지 않은 문제인데, 쉽게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진짜 부유한 이는 그 부분에 걸림이 없다. 그저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과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다르다. 나도 어떤 상황을 만나면 감정에 휩쓸리지만, 그럴수록 그런 부분에 내가 닦을 바가 있음을 깨닫는다.

비난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받을 비난이라면 당연히 감사히 받을 것이다. 고치려고 불법을 배우지, 나를 세우려고 배우는 불법이 아니다. 그런데 그 비난하는 마음이 무엇을 위함인가를 생각하면 좋겠다. 교만을 말하면서 보살심을 말했다. 그 보살심을 들어 나를 나무라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교만에 찌든 내가 그것을 벗어나 겸손하고 밝아지기를 축원해주고 있는가? 그 정도의 마음, 안타까워하고 가여워하는 마음이라면 오늘 내가 배울 부처의 자비가 그대의 마음이다.

내가 적는 글들, 내가 하는 말들, 그 글과 말을 나에게 다시 들려주며 산다. 며칠전 염불하는 마음에 부처 깃들라고 글을 적었다. 염불을 시작하면 그런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기원한다. 종종 내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 읽기가 어렵겠다 싶기도 한데, 그래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과 마음을 다 알아보기 어렵겠다 싶기도 한데 쓰다보면 이리 되는 아직은 하열한 수준이다.


알아차려야 바꿀 수 있다.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하는 날, 불성으로 밝아지는 날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