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일체유심조
1년 전에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대화중에 한 지인이 사용했는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말의 논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때 잠시 글을 적었었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글을 적고 나서 일체유심조를 두고 두고 생각해 보리라 다짐했었는데, 그 다짐처럼 두고 두고 사유하지 못했었다. 미뤄둔 숙제가 되어 버렸는데 관련하여 명확해진 부분이 있어서 적어보려고 한다.
앞에 주인공 마인드를 거론하며 불교가 혼란스럽다고 했던 이는 '그때 그때 상황따라'라는 표현을 글에 적었다. 그때 그때 상황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적용하면 생각하면(?) 되는 것이냐. 거칠게 말해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냐 였던 것 같다. 주인공 마인드 글을 마쳤는데 일체유심조와 연관된 생각이 들었다.
일체유심조는 불성, 그 본성과 관련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불성은 굳이 말하자면 지극한 객관과 지극한 주관이 혼재된 자리다. 일체유심조를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표현하는 것,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객관을 무시한 반쪽짜리 진리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자리에서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인과, 그 모든 것을 가감없이 변형없이 그대로 알아차린 바탕 위에서 한 생각 일으켜 모든 것을 짓기도 허물기도 하는 것이다. 완벽한 주관이다. 객관을 떠난 주관은 이상해진다. 그냥 내 마음 편하면 된다는 논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말이 전적으로 이상하다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충분하지 않으며 약간 어긋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그렇게 활용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심오하다.
모든 것을 마음이 짓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속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맞더라도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다. 쉽게 거론할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짙고 짙은 업장으로 불성이 능히 이루는 그 일들이 우리에게 쉽사리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알아도 그런 도리로 살아가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 그대로 일체유심조될 날이 눈앞에 펼쳐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