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어리석은 이들과 사귀지 않고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5. 10. 13:27

묘법연화경 비유품 게송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을 애경하되 어리석은 이들과 사귀지 않고

산굴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는 이들에게

이 거룩한 경을 설할지니라


이 비슷한 메세지의 구절들이 법화경에 나오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정확하게 어떤 구절인지 적기 어렵다. 오늘은 이것만 가지고 적어보려 한다. 위 구절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법화경을 설하라고 하면서 읊는 여러 구절 중 하나이다. 내가 느끼기에 산굴에 사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애경하되 어리석은 이들과 사귀지 않는다는 부분이 좀 더 크게 다가온다. (이제 내가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여서 그런지 요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는 어떤 사람을 말함일까. 지혜롭지 않은 사람을 말함일 것이다. 그럼 지혜는 무엇일까. 당신에게 닿아 있는 지혜는, 그래서 어리석지 않음은 무엇인가.


요즘 교통사고 휴우증으로 물리치료를 다니고 있다. 치료실에는 커튼과 간이 칸막이로 나누어진 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다. 어제 누군가가 치료사를 부르더니 한 할머니 환자를 데리고 왔던 간병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환자에게 아가리를 닥치라고 말하는 등 너무 심한 언어폭력을 행사함에도 아무도 저지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항의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런 일도 있구나 싶어 씁쓸했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누워 전기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옆 칸에서 치료를 받던 어떤 할머니 환자 분이 나가야 하는 상황인 듯 했다. 치료사가 간병인을 호출하니 내려온 간병인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앉아.... 개소리 하지 마.' 환자를 사람아닌 개 대하듯 한다. 어깨에 전기치료 기기가 달려있는 상황이라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그저 누워 작은 소리로 '뭐 저따위로 말을 하지'했는데 하루 종일 후회했다.


할머니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인데 그래서 간병인이 힘든 모양인데 그래도 말이 안되는 상황아닌가. 어제 이후 오늘까지 그 생각이 머리에 이어져 다음에 만나면 어떻게 할까를 가지고 고민했다. 오늘은 휴대폰을 챙겨 여차하면 녹화하고 신고를 하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치료사에게 물어보니 간병인이 하루 하루 바뀐다고 했다. 오늘 온 간병인은 인간이었다. 누구나 병들고 늙는다. 자신은 늘 그렇게 생생할 줄 아는가. 뿌린대로 거둔다. 악업을 심고 뿌렸는데 바로 받지 않는다면 이자까지 쳐서 혹독하게 받는다. 무엇이 지혜이고 무엇이 어리석음인가. 이런 이치를 알아 인간을 대함에 겸손하고 바른 언행을 하는 이가 지혜에 가깝다. 이렇게 날마다 악한 언행으로 씨를 잔뜩 뿌리고 언젠가 좋지 않은 일이 닥치고 나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한탄하는 이가 어리석음에 가깝다.


불자는 모든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 간병인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런데 그 간병인과 같은 사람과 사귀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런 사귐이 견고하지 못한 나의 마음을 흐려 서로 좋지 않은 곳으로 함께 나아가는 인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애경과 사귐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또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한동안 나의 숙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분명한 것은 어리석은 이들은 애경의 대상이지 사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을 스스로가 어리석음에 가까운지, 지혜에 가까운지, 어떤 이를 사귀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