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지 말았으면
불성에 밝음이 없다는 불재님의 글을 보고 적어봅니다. 늘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적길래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적어봤습니다.
일단 생각없이 하는 말들이 아니다. 밝은 날이 되라, 맑은 날이 되라는 것은. 불성으로 가득한 밝은 날이 되라는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밝게 알아차리고 그대로 살아가는 날이 되라는 나의 발원이다. 맑은 날이 되라는 것은 탐진치의 여러가지 가리는 것들이 없는 불성 그대로의 청정함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라는 나의 발원이다. 이것만 제대로 이해해도 이미 끝난 글이다. 더 길게 적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둠을 대비하여 밝음이라 말하면서 그러니 불성에 밝음이 없다 말하는 그대를 위해 조금 더 적겠다.
내가 처음 불성이라 할 것에 마음이 닿았을 때 정말 신세계였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모든 것은 그 불성이 일으킨 작용일 뿐이다. 시작이 어떠한지 끝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고요하며 생각과 시비분별을 넘어서 있다.' 다 표현하지도 못하지만 사실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아주 조금 맛봤는가 하지만 말그대로 그것도 모를 일이다. 불성은 나에게 그렇다. 어찌되었든 이 글이 지금 내 근기에서 나름 최선이라고 하겠다.
자, 묻겠다. 답을 해보라.
첫번째, 비교하여 일어나는 것들의 무상함을 넘어서서, 다시 말해 비교의 대상이 아닌 불성 그대로를 나는 밝다 말하고 맑다 말한다. 그것이 전도몽상인가. 전도몽상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이름이다. 실상을 실상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그것이 전도몽상이다. 불성이 있어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착각하여 나라 하고 이렇다 하고 저렇다 하는 것을 알았다면 무명과 멀다. 이것은 전도몽상인가.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그게 불성의 자리이며 전도몽상을 넘어선 자리다. 표현이 밝다 하고 맑다 했을 뿐인 것에 너무 걸려 넘어지지 말았으면 한다.
둘째, 당신은 그저 평온하게 있을 뿐인 불성을 왜 그토록 간절히 부르는가. 얻을 것이 없다 하면서 무엇을 구하여 염불하는가. 그대의 논리대로라면 나야말로 그대를 향해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라 하겠다. 그대의 말에 그대가 걸렸다. 잘못하면 말장난처럼 되기 십상이라 나는 이런 종류의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얻을 바가 없다 주장하는 그대는 그 말 그대로인가. 말이라 하고 생각이라 하는 작용을 거치는 순간 이미 불성 아니다. 우리가 말로 하고 글을 적을 때 이미 불성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하고 말을 하며 그것을 표현하려 하고 그 너머를 알려 한다.
부처를 표현한 글 중 지금도 마음에 깊이 남아있는 표현이 하나 있다. 부처는 바람없이 일어나는 파도 같다고 했다. 그저 평온하며 온갖 것들이 일어나는 그 불성이 인연없이 일어났다. 왜일까? 왜 일어나서 꿈같고 허깨비같은 이 세상에 나와 무명을 벗어나라 할까. 나는 불성을 모른다. 그대는 아는가.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밝게 알았다면 모든 것이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리라 생각한다. 어리석음으로 고통을 만들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상이 알아질 것이다. 그런 밝게 알아차린 성품은 곧 자비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처의 품성을 자비라 한다. 불성은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왜? 이미 말했듯이 밝게 아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품성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모든 인연을 알아차린다면 우리 역시 그럴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자신을 생각해보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보인다.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그러하기에 그저 평온하며 공한 자리인 불성은 허깨비같은 이 세계로 나와 부처로서 중생을 향해 쉬임없이 이야기한다. 무명을 벗어나라 한다. 불성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품성 덕분 아니겠는가.
부처를 말하고 싶다면 세상이 허깨비임을 알아 깨어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허깨비같은 세상을 인정해야 한다. 눈을 똑똑히 뜨고 보라. 우리가 만나는 부처는 이 허깨비같은 세상으로 들어와 나에게 말을 거는 부처다. 부처조차 세상을 인정하고 들어왔는데 그대는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그것이 시작이 되며 점차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게 된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 있는가. 세상에 들어온 부처는 만났는가. 그래서 이제 세상이 허깨비라고 외치고 있는가. 그렇다면 허깨비같은 세상을 그렇게 부정만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실상이며 그 자체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는 바도 없고 얻을 바도 없다는 이 말을 어떤 심정에서 하는지 모르겠다만 잘 모르는 나도 가끔 그런 말이 나온다. 정말 안다고 할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정말 얻을 바도 없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아는 바를 말하고 얻을 바를 말한다. 그게 서로 걸리지 않으며 편안할 때, 그 때 불법이 밝음 없다 말하면 아마 아주 다른 법문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내 근기일 뿐이니 더 나아갈 바가 많은 부끄러운 글이라 생각하지만, 전에는 신묘한 현상에 매이더니 이제는 무아, 무상에 매이는 그대의 모습이 조금 신경쓰여 적어봤다. 무상, 무아는 좋은 것인데 왜 그대의 글에서는 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법화경 1일 1독 1년의 근기는 아니지만 법화경을 읽는 나는 아무튼 좋은 것 같다. 염불하는 불자는 그저 부처님을 믿고 염불하는 게 좋다 생각한다. 불성에 닿는 일이니 점차 불성 그대로가 드러날 것이다. 그걸 나는 밝다 표현한다. 그대로 알아차리는 고요한 자리니 제대로 만난다면 흐리는 말을 할 일이 점점 없어질 것이다.
쓰다보니 좀 초점 흐려진 글인가 싶기도 한데, 지금 내 근기가 그러해서 이 정도로 마무리하려 한다. 아무튼 불성의 밝음을 말하는 것에 무상을 이야기한 것은 내 상황과 그닥 맞지 않아서 적어봤다. 나름 항변이려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지만 밝음을 말하고 어둠을 말할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이 내가 만난 부처님 법에는 있다. 부처님 법으로, 법 안에서 걸림없이 자유로워지기 바란다.
나무 묘법연화경 _()_
나무 석가모니불 _()_
나무 아미타불 _()_
나무 일체불보살 _()_
오래 적은 글인데 머리 산란할 분들은 그냥 휙 날려버리시기 바랍니다.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