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혜와 자비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3. 12. 08:11

2018년 가을에 적었던 글이다.


아침에 공원을 산책하는데, 갑자가 어떤 할아버지가 불러세웠다. 잠시 자신에게 오라고 했는데 걸음을 멈춘 그 자리에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2천원을 달라고 한다. 자신이 슬리퍼를 신고 집에서 나와서 다시 들어갔다가 오기가 힘든데 술을 사게 모자란 돈을 달라는 것이다. 일단 휴대폰만 가지고 나온지라 현금이 없다고 말을 하고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공원을 걸어나오며 잠시였지만 많은 고민을 했다. 술이야 100여 미터 떨어진 편의점에서 사다 드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카드가 있으니. 그런데 술이지 않은가? 배가 고픈 것이라면 편의점에 모셔가 도시락을 사드릴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데 술이지 않은가? 그래, 술이라도 사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번에 사준다면 다음에도 그 사람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그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다. 무엇이 자비이고 무엇이 지혜인가를 고민하며 공원을 벗어났다.

'만약 할아버지가 부처님의 변신이라고 하면' 이 가정을 내내 생각했다(부처님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투어 우리를 가르친다고 지장경에 나온다. 대단한 선지식만이 불보살의 화신, 나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불보살은 순간순간 자연을 통해, 상황을 통해, 사람을 통해 우리를 가르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할 뿐. 그런 맥락에서 아주 가끔은 부처님인가 할 때가 있다. 이건 나의 상상(?)과 가정의 말일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무엇이 가장 제대로 한 것일까?  고민의 끝에 그 자리를 그대로 벗어났지만, 부처님이 '너 잘했다' 하실지 궁금했다. 솔직히 지금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건 내가 넘어가야 하는 숙제다. 지혜로운 자비. 

누군가 필요를 채우지 못해 부탁을 하면 대부분 들어줬던 것 같다. 물론 못들어주는 것이 있고 내 욕심으로 안들어주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대응을 해주는 것이 편했다. 그런 나였기에 예전이었다면 할아버지의 청을 뿌리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찝찝했을 것이다.

자비가 참으로 자비이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술을 먹겠다고 돈을 달라던 할아버지의 청을 뿌리친 나는 지혜로운 자비에 가까웠을까? 참으로 지혜로운 자비는 어떤 모습일까? 



2019년으로 돌아와보자.

생명카페 희망쉼터를 거론하며 적은 글에 덕명을 지지하는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았다. 지금까지 나를 대하던 사람들과 사뭇 결이 달랐다. 자신이 배워 믿고 있고 늘 고마워하는 대상인 덕명의 논리를 이상하다 하는 나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고운 마음이 느껴졌다. 그 마음이 그 사람의 길을 밝고 바른 곳으로 인도하길 잠시 발원해본다. 모든 것이 각자의 인연따라 흘러가지만 순간 순간 우리가 일으키는 선한 마음과 선한 행동 하나가 선근이 되어 복으로 이어지니 나를 향한 그 좋은 마음이 능히 복을 이루어 나가기를 법계에 빌어본다. 

그 분은 덕명이 좋은 의도로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자신의 삶이 너무 좋아졌기에 부처님과 덕명의 가르침이 같다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진 것으로 부처님과 같은 말이라고 하는 것은 글쎄.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다고 본다. 그 글을 읽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처님 법을 배워오면서 마음에서 자비가 나와 무엇인가를 하고자 했을 때 다시 말해 생명을 살리거나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주고자 했을 때 마음에 닿았던 부분이 떠올랐다.

자비가 곧 참으로 유익함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지혜없는 자비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밝히 알아야 결국은 상대를 온전히  밝힐 수 있다. 밝히 알지 못하는 이의 자비는 선한 뜻과 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엉뚱한 곳으로 우리를 끌고갈 수 있다. 위에 적은 2018년의 고민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결국 할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어떤 행동이 유익함으로 귀결되는 밝은 자비가 될 것인가의 문제인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자비와 다르지 않고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판단하는 힘은 지혜에서 나온다.

또 예를 들자면 한동안 천변의 산책로를 운동삼아 걸을 때 자전거에 치여 죽거나 햇볕에 말라죽는 지렁이가 가여워 길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주려 한 시기가 있었다. 정말 지렁이를 살리고 싶다면 위해요소가 없고 지렁이 생존에 어떤 곳이 최적인가를 알아야 참으로 지렁이를 살리는 유익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그런 것에 대해 밝게 알지 못한 채 단지 자비로운 마음으로 지렁이를 들어 길가로 옮겨준다면 잠시 자전거를 피하고 햇볕을 피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어찌보면 나의 그 자비로운 개입이 더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 때에도 자비로운 마음이 능사가 아님을 생각했었다.

선한 마음은 곧 선한 결과로 이어질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목이 마른 이에게 물을 건네주는 것은 자비가 맞다. 하지만 그 안에 주는 이도 받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량의 독이 들어있어 마실수록 중독된다면 그것은 결국 선한 것일까? 물을 건넨 그 마음은 좋으나 바르게 알지 못해 중독되는 결과는 피할 수 없다. 선한 마음이 곧 선하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려면 지혜로운 자비가 되어야 한다. 내가 보이는 자비에 지혜가 담겼는지, 내가 받아 마음따뜻해지는 자비에 지혜가 담겼는지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 아침 샤워를 하며 모든 것은 인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그런 인연의 흐름 속에서 만나고 헤어질 뿐이니 나의 이와 같은 개입은 이미 충분한 지점을 지나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런 것을 밝게 알아차리는 수준이 아니라 많이 미흡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이 마음도 중생을 대하여 부처님이 어떻게 행해오셨는지에 생각닿으면 마주하는 이들이 불편해하는 이 자리에 머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고민들이 또 사람들이 쓰는 그 좋은 마음이 선근복덕 이루기를 내 안에, 온 법계에 가득하신 불보살님 전에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