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에 통하라.
예전에 어디선가 형제 스님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하지 않지만 기억을 떠올리면 대략의 내용이 이렇다. 형제가 출가해서 따로 수행을 했는데 동생은 똑똑해서 이런 저런 경전을 섭렵하고 여러가지 불공도 척척 주관하는 유능 유식한 스님이 되었고 형은 단 하나의 경전, 천수경이었는지 불자들이 친숙하게 보는 경전 하나만을 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동생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자랑하듯 말하면서 형을 가볍게 여겼는데, 형이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이 공부한 경전을 독송하자 꽃비가 내리고 향기가 나는 등의 신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을 보고 동생은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며 법계가 감응하는 형의 수행을 찬탄했다는 그런 내용이다.
수행을 깊이 하신 분들이 주변 사람에게 하는 조언의 글을 읽으면 하나로 통하라는 글을 종종 본다. 잘은 모르지만, 내 경험에 비춰볼 때 그 말에 동의한다. 여러가지 측면이 있을 것 같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수월하기도 하고 하나에서 깊어지면 다른 것들과 통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또 다른 단계의 공부로 넘어가는 단단한 기틀이 되기도 한다. 또 잠깐 공부해서 안다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고 변화를 기대하기에도 힘이 부족하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수행한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수행은 마음의 변화, 행동의 변화 등 여러가지 변화를 전제로 한다. 지적인 만족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면 한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수행의 성취를 위해 더 효과적인 것 같다.
경전을 읽는가? 하나를 여러번 오랜기간 읽어보라. 글이 살아서 마음에 돌고 생각에 돌고 삶에 돌아다닐 때까지.
염불을 하는가? 하나를 친구사귀듯 생각날 때마다 친밀하게 불러보라. 생각없이도 자연스레 입에서 마음에서 흘러나올 때까지.
각각의 방식이 있겠지만 하나에 통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염불 하나에 경전 하나를 읽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부처님을 배우는 따라가는 균형잡힌 길이 되어준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선정이 되고 지혜가 된다. 계정혜가 갖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