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혼자 하는 수행이 불행해진다는 말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23. 09:16

누군가 혼자 하는 수행은 불행해진다고 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도 했는데 그 사람의 숙업때문이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표현대로라면 혼자하는 수행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혼자 수행하는 내가 생각하기에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몇 가지 측면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먼저 수행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혼자라고 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지니는 순간 나를 가르치는 수많은 불성의 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뜻이 바르고 행하고자 하는 노력이 진실하다면 무엇이 바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힘을 끊임없이 느끼게 된다. 그것을 부처라 하든 보살이라 하든 선신이라 하든 내 안의 불성이라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나가는 이의 수행은 혼자만의 수행이 아니다. 혼자 독경, 다라니 독송, 염불, 무엇을 하든 동일하다. 탐진치로 움직이는 사람보다 믿을만한 존재가 수행자를 늘 지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혼자 살 수 있는가? 가끔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있지만, 대부분 보통 사람들은 가족, 동료 같은 이런 저런 인간적 교류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관계 속에서도 가르침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가 살아있는 수행이다. 그러니 세속과 단절되지 않고 살아가는 이의 수행은 혼자하는 수행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사찰, 가정, 교우집단 등 단체에 속해 살아간다면 혼자 경을 읽더라도 혼자하는 수행이 아니다. 솔직히 불법과 관련된 집단보다 사회의 집단이 더 험하니 어찌보면 그 사회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며 사는 것이 더 고난이도의 수행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혼자 하는 수행이 불행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수도 있지만 핵심을 비껴간 주장같다. 혼자 하든 단체로 하든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받아지니고 수행한다면 점점 청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 과정 속에서 혼자 하는 것보다 부처님 가르침을 나눌 수 있는 선지식, 도반들과 함께 함이 유익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혼자 수행하면서 업의 장애를 훌륭하게 벗어나는 이들도 있고 단체로 수행하면서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이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업의 장애를 극복하는 것은 온전히 수행자의 몫이며 그것은 모여서 법을 공부하는지 아닌지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법화경 묘장엄왕 본사품에 보면 왕의 두 아들이 묘장엄왕을 부처님께로 이끈 후 왕은 부처님께 법을 들은 후에 사유하는 과정을 거쳐나간다. 선지식이 인연자를 법으로 이끌고 나서 법으로 수행해나가는 것은 이끌린 자의 몫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의 인도로 부처님의 바른 법에 들어갔다면 경전읽고 법을 사유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 과정이 진실하면 부처님이 늘 이끄니 혼자하는 수행이 아니며 생활 가운데 가르침대로 살아가려 하니 무인도에 살지 않는다면, 세속을 떠나 홀로 산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 또한 혼자하는 수행이 아니다.


법화경에 나온 수행의 모습을 보면 세상의 번잡함에서 떠나 홀로이 수행하는 이들의 모습도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 모습을 설하는 어조는 탓하거나 비난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런 모습으로 수행하는 이도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부처님은 그렇게 수행하는 이들에게 여러 존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나의 이 말에 대해 누군가는 우리의 근기가 다르다, 시대가 다르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읽는 것은 곧 설법을 들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혼자 하는 것이 불행으로 나간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끝내면서 이런 말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군대에 들어가서 환경이 바뀌면 사람들이 변화한다. 하지만 전역하면 오래지 않아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가져오는 일시적 변화가 아니라 환경이 어떠하든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변화이다. 또 다이어트를 하는 이가 단식원에 들어가 음식이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날씬해졌을지라도 근본적으로 식탐이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면 음식에 접근 가능한 환경으로 변화하는 순간 요요가 찾아온다. 그러니 혼자하는지, 모여하는지가 수행의 행, 불행에, 성공, 실패에 결정적이라 할 것인가. 그 마음을 스스로 어떻게 다스려나가는지, 그래서 환경이 변화해도 얼마나 견고한지가 중요하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따지고 보면 혼자하는 수행이 불행한 것이 아니다. 단지 (바르게 법을 받아지니는 단체라면) 모여서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법을 바르게 받아지니는 것이 아니라면 모이지 않는 것이 나에게 유익할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니 모여서 하고 싶다면 먼저 경전의 가르침대로 가르치는지 알아보고 모임에 들어가기를 권한다. 숙업, 즉 전생의 업에 대해서도 적어보려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고 내용이 산만할 듯 하여 다음에 적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