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일체지자의 지혜와 승자들만의 십력
법화경 본생품(화성유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이제 그대들에게 이르거니와
마땅히 일체지자의 지혜를 위해
가장 큰 정진력을 최고로 일으킬지니
아직 그대들은 적멸에 이르지 못했느니라
그러나 그대들이 일체지자의 지혜와
승자들만의 십력을 성취하게 되면
비로소 삼십이상을 갖춘 부처가 되리니
이로써 영원토록 안온케 되리라
대통지승여래는 일체마의 무리를 깨뜨렸지만 정각에 이르기까지 십중겁을 고요히 앉아있어야 했다. 게송에서는 일체법의 진실상을 보았지만 정각을 얻지 못해서 십중겁을 머물고나서야 정각에 이르렀다고 표현한다. 법화경을 읽다가 이 부분이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왜일까. 일체법의 진실상을 보았는데 왜 정각을 이루지 못했을까. 왜 십중겁을 고요히 앉고서야 정각을 이루게 된 것일까. 십중겁을 머문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솔직히 명확하게 설명할만큼 알지 못하지만 조금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다. 바로 일체지자의 지혜와 승자들만의 십력을 성취해야 삼십이상을 갖춘 부처가 된다는 구절에서였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지혜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일체법의 진실상을 본 이후에 십력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고요히 앉아 지낸 십중겁의 의미는 아닌지.
부처님을 양족존이라 한다. 지혜와 복덕이 충만한 분이라는 뜻 아닌가. 지혜는 말 그대로 일체지자의 지혜일 것이며 복덕은 승자들만의 십력과 연결된다고 이해된다. 내 근기에서 그러하다. 그러니 불자는 지혜가 충만해지고 힘을 얻어가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히 부처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또 덧붙이자면 부처님이 말하는 적멸은 32상의 부처가 되어야 이를 수 있는 것으로 영원한 안온에 들게 한다. 그러니 적멸은 죽고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부처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살아도 부처라면 적멸인 것이고 죽어도 부처 아니라면 적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