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다고 합니다.

향광장엄주주모니 2020. 4. 12. 11:23

법화경 희수공덕품(수희공덕품)에 보면 법을 듣고 들은대로 또는 이해한만큼 전해 50번째에 이른 사람의 공덕에 대해 나옵니다. 법을 전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듣고 이해한만큼을 전했을 때, 그 법을 들어 받아지닌 이의 공덕입니다. 이 때 '내가 들었는데 ~라고 해.'라는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전한 자의 이해가 최초 법을 전하고자 하는 이의 의도를 완전히 비틀어버린 결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법을 전한 것이 맞을까요? 들은 자는 법을 전해들은 것이 맞을까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그런 측면에서 충분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배우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다시 공왕불 기도에 대해서 생각이 일어서 글을 적게 되었는데, 그에 대해 적히는 댓글을 읽으면서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덕명의 지도를 받는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기보다 덕명이라는 사람의 이해, 주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확인할 생각도 없이 읽어주고 써주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어 마음 편하고 현생이 행복하다면 어떤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 되겠지만, 법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다고 합니다.'라는 말을 할 때에는 '내가 그렇게 들었는데 무슨말인가. 직접 확인해봐야겠다.'라는 의도를 스스로와 듣는 이 모두에게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삼시'를 들어 연창 외의 모든 수행법을 부정하면 그 '삼시'가 나온 부분을 찾아보고 직접 확인 후 그런 것인가를 사유해야 하는 것이고, '공왕불'을 주장할 때에는 '수학무학인기품에 한번 나와'라는 말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을 열어 그 부분을 직접 읽고 그런 것인가를 사유하고 확인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확인하지 않더라도 중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사유하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한다고 해.'라는 말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 말에 안주한다면 그 결과는 자신이 바라는 것과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산으로 간다고 했는데 열심히 달린 결과 바다에 닿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직접 부딪치고 마주하고 사유하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서 부처님의 본 가르침에 닿아가는 바른 수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운 뜻이 우리를 일으키고 나아가게 만듭니다.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지녀고 살아가는 것으로 뜻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 인연이 남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머무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선택에 따른 모든 결과는 선택한 자가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선택이 최선인가를 잘 살피라 거듭거듭 말하고 싶습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