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주장하는 마음
배가 고픈 자가 주린 배를 채우려고 먹을 것을 찾았다. 이것을 먹어보니 향이 좋지 않고 저것을 먹어보니 맛이 좋지 않고 또 다른 것을 먹어보니 식감이 좋지 않아서 먹을 마음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빵을 하나 발견하여 먹게 되었는데 향도 좋고 맛도 좋고 식감도 좋아 즐겁게 먹을 수 있게 되어 주린 배를 모면하게 되었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만약 이 배부른 자가 자신처럼 배고픈 이가 있음을 생각하고 발원을 한다면 어떤 발원을 할까. 아마도 '내가 먹은 이 빵이 최상이니 다른 이들도 이 빵을 먹기를 기원합니다' 할 것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라. 모두가 같기도 하지만 같지 않기도 하다. 다시 말해 배가 고프면 괴롭다는 사실이 같지만, 모든 이들의 음식 취향이 다르다. 많은 음식을 만났으나 먹을만하지 않아서 먹지 않다가 빵을 만난 후에야 만족스럽게 먹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만약 이런 사실을 통찰하는 사람이 배고픈 이들을 위해 발원한다면 어떤 발원을 할까. 아마도 '배고픈 이들이 각자에게 적절한 음식을 취하여 배고픔을 벗어나 기운나기를 바랍니다' 할 것이다.
사실 시비도 없고 정답도 없는 상황이다. 다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의 문제가 있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면 될 뿐이다. 이제 그것을 부처님 법으로 말해보고자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라면 법문의 다양성이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서 연유한다는 사실을 안다. 부처님이 그리 말씀하고 계시며 조금만 둘러 보아도 세상이 정녕 그런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참고로 덧붙이면 불법의 끝은 하나다.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근기인데 조금 더 자비심을 낸다면 어떤 기원을 하는 것이 지혜롭다 하겠는가. 하나만을 주장하기 보다 각자의 수준에 맞는 법으로 시작하여 최상의 법에 이르기를 기원해주는 것이 지혜롭다 할 것이다.
기도를 주장하는 마음이 이런 사실에 닿는다면 사뭇 그 결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취향이 다름을 아는 지혜, 그 취향에 맞는 법들이 있음을 아는 지혜, 그 법들이 결국 하나로 귀결됨을 아는 지혜, 이런 지혜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디 먼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많이 공부한다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많이 나온다. 법화경을 읽어보면 이런 표현들이 상당하다. 그러하기에 하나의 기도만이 모든 것인냥 주장하는 글을 읽을 때면 지혜로운가, 부처님의 뜻을 제대로 마주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