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의 사행관
오늘 읽은 글에 달마대사의 사행관이라는 내용이 나왔다.
탄허택성선사라는 분이 쓴 글이라는데 적어 공유하려 한다.
조사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과정에서 달마대사의 '사행관四行觀'을 간절해한다.
사행관을 살펴보면 첫째 보원행報怨行, 둘째 수연행隨緣行,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 넷째 칭법행稱法行이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원행은 어떤 액난厄難이나 고통을 당해도 이것이 과보果報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중국 사람들은 칼을 맞고 죽을 때도 합장을 하며 '천명天命'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멀리 유교, 도교에서부터 싹터 온 사상이다. 혹시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들은 천명이라 생각하고 편안히 눈을 감는다. 이와 같이 어떤 액난을 당해도 과보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히 갖는 것이 보원행이다.
둘째,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위다.
고통이란 원이 많은 것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인데, 구할 바가 없다고 하면 그것이 가장 잘 구하는 것이다. 도를 구하는 것은 구하는 바가 없는 구함이다. 이에 비해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재물, 이성, 음식, 명예, 수명) 등 오욕五慾을 구하는 것은 구할 바 있게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고통이 많이 따르는 구함이다.
셋째, 수연행은 연을 따르는 행위다.
연을 따른다는 것은 굳이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연을 따라서 행하는데, 일이 닥쳤을 때 응작應作, 불응작不應作을 관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끊어 버려야 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이기심이요, 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것 또한 안 되는 일이다. 해서 안 될 일은 과감히 끊고, 해야 할 일은 목숨을 바쳐서 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수연행이다.
마지막으로 칭법행은 법에 합한다는 뜻인데, 이 법은 사회법이 아니라 진리에 합한다는 의미다.
능能과 소所가 다 끊어진 것, 즉 내가 하는 바도 없고 할 바도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처럼 마지막 회통되는 것을 칭법행이라고 한다.
이것이 달마 대사의 사행관으로, 수행자는 칭법행을 통하여 도에 들어간다.
어떤가. 솔직히 사행관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그 내용을 하나씩 보면 익숙한 표현이 있기도 하고 이미 닿아있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먼저 공부하는 불자의 삶에는 보원행이 어느정도 녹아들어 있다고 본다. 일어나는 일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받아들이면서 오늘을 밝게 지어가려 노력한다.
둘째, 무소구행은 가르침 속에서 여러차례 듣게 되는 말이지만, 어렴풋이 '그런가'하더라도 생생하게 만져지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구한다는 행위의 많은 부분이 탐욕과 이어지므로 고통으로 귀결되는 것이라 이해된다. 수행자의 도를 구하는 마음이 도를 이루도록 이끌지 모르지만, 만약 도를 이루게 되었다면 구하는 마음은 다른 색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구할 바가 없다는 것으로 귀결될 것 같고 구하는 뜻을 일으키더라도 구할 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일으키는 그런 뜻과 행이 될 것 같다.
셋째, 수연행은 알듯 하지만 지금의 근기로는 어렵다. 연을 따르기로 마음먹더라도 연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 명쾌하게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지혜가 바탕되어야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연을 만났을 때 그 연에 대해 내가 해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머물 곳과 떠날 곳, 머물 시기와 떠날 시기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아직은 그것이 많이 어렵다. 회피할 마음도 집착할 마음도 없지만, 무엇이 불자의 최선이며 최적의 선택인지를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냥 연을 따른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잘모르겠다. 최선을 다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정해진 것들이 있는 동시에 또한 내가 지어가기 때문이다. 그 지어감이 모두를 위해 최선이 되기를 바라지만 무엇이 최선인지 자연스럽게 알아질 힘이 부족하다.
넷째, 칭법행은 그대로 수행인 것 같다. 수행자가 이뤄가려는 '법대로의 삶'을 말함 아닐까. 지금은 깊은 고민 속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어렵게 합해가지만 수행이 깊어질도록 내가 곧 법의 본성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이 곧 칭법행일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도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교리적으로 무식하다. 용어에도 무식하고 개념에도 무식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장경 읽고 법화경 읽고 인연따라 선지식들의 법문을 읽고 걸어가는 길 위에서, 내가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교리에 있고 용어에 있고 개념에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은 용어를 통해, 배우고 잘 정리된 개념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내 안에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 오늘 달마대사의 사행관을 읽으면서 또 한번 비슷한 경험을 했다.
네 가지 친구가 다 의미롭지만, 지금의 내 근기에서는 보원행은 사귄 친구요, 수연행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귀는 중이라 깊은 고민에 들게 하는 친구와 같다. 보원행을 가까이 하라, 삶이 편안해진다. 수연행을 가까이 하라,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 그 현상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위한 숱한 고민들이 일어날 것이고 부족한 지혜에 처절해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깊은 도에 여전히 멀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흐른다면 정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