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을 읽다가, 염불을 하다가 공왕불기도에 대해서 든 생각(육근청정, 나마삳다르마푼타리카수트라)
며칠 전 법화경을 읽다가 참 어처구니가 없어졌습니다. 아, 경을 읽는다는 것이 그런 것임을 알면서도 경험을 하나 할 때마다 다시 '아, 그랬네'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공왕불 기도자들이 육근 청정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육근 청정은 법사공덕품에 언급되고 있고요.
법사공덕품을 보면 어떻게 육근의 청정을 이루게 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첫 부분에 이리 나옵니다.
'선남자여 이 법문을 지니고 읽고 가르치고 쓰고 또 쓰게 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팔백의 눈 공덕과 천이백의 귀 공덕과 팔백의 코 공덕과 천이백의 혀 공덕과 팔백의 몸 공덕과 천이백의 뜻 공덕을 얻게 되리라. 또한 이 많은 공덕으로 인하여 육근 모두가 청정케 되리니, 가장 완전히 청정케 되리라.'
그러니 육근의 청정을 말하고 싶다면 법화법문을 지니고 읽고 가르치고 쓰고 또 쓰게 해야 합니다. 너무 명확한 일 아닙니까?
공왕불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글 적은 날이 얼마이고 법화경 읽은 날이 얼마인데 이런 명확한 이야기가 며칠 전에야 인지 안으로 들어왔으니 어처구니가 없어졌습니다.
또 염불을 하고 나서 홀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법화경 법문만 전적으로 온전히 지니고 공경, 공양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다라니품을 보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만약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법화경 법문만 전적으로 온전히 지니고 공경, 공양하는 이의 얻을 바는 어떠할까?'
내 스스로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를 한번 해볼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떨까요? 여기에 대해 대략 두가지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다른 기도자들처럼 어떤 큰 변화가 없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라는 강요된 생각으로 만들어진 일념,집중도에서 여타 기도자들과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인가, 저 기도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집중, 일념의 문제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말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확연한 변화가 있다면 나는 법화경 독경 등의 수행에 한마음으로 더 매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하다고 언급하신 일에서 즐거움을 맛보았기에 훌륭함을 맛보게 한 그 자세를 유지하여 더 훌륭하다고 한 일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는 믿음이 더 견고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미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염불하고 독경하면서 공왕불 기도자들이 말하는 신체적 정신적 증상들을 겪어왔습니다. 지금도 탐진치의 생활에 노출되었다가 다시 수행으로 들면 짧은 시간에 걸쳐 정화됨을 느낍니다. 때를 벗기고 목욕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싶네요.
삿된 생각에 드는 순간 몸으로 뭔가 들어온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해치는 것은 아니나 탐진치로 빈틈이 생겨 파고드는 것이고 또 청정함으로 돌아가면 사라집니다.
어제는 흐린 정신으로 시간을 낭비하다가 잠자리에 드는데 그 순간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명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꿈으로도 이어집니다. 육근의 청정을 말하기에는 멀지만 점차 그냥 알아지거나 알게 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런 것들은 내가 바르게 나아가는가를 스스로 알게 합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더 좋아지겠죠.
공왕불 기도자는 명심해야 합니다. 법화경을 내세우고 싶다면 법화경을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나름의 이해라고 해도 그 바탕을 크게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육근의 청정을 주장하면서 경에서 적은 그 방법을 부인하는 것은 너무 큰 부담이 될 것입니다.
이것도 훌륭하나 저것은 어떠하겠냐는 말은 저것이 더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나마 삳다르마 푼타리카 수트라보다 법문만을 온전히 지니고 공경, 공양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법문을 지니고 공양, 공경하는 것의 참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꽃, 향, 여러 가지 진귀한 것을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경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는 오종의 수행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공왕불 기도의 주장은 법화경의 가르침과 상이합니다. 우리가 어느 날인가 같은 곳에서 만날지 모르지만 나는 멀리 돌아가는 길에 들고 싶지 않으며 그대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