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예전에 구인사에 갔을 때 다른 이를 따라 스님과의 상담자리에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스님이 답하시길, '가피는요, 남들 다 있는거 없다가 이제 기도해서 받은 거잖아요.'하신다.
굉장히 시크한 그 대답에 웃음지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 그러하지 않은가, 남들 다 갖는 아이를 못가져 괴롭다가 아이갖고 싶다 발원하고 이루면 가피받았다고 한다.
남들 다 살만한데 마음이 병들고 육신이 병들어 못 살 지경이 되면 제발 살려달라 발원하고 편안해지면 가피받았다고 한다.
나도 그러하긴 하다만 아무튼 이 기억이 어떤 글을 읽으면서 생각났다.
비정상을 기준으로 삼아버리면 적절하지 않은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 수 있다.
행해온 일들이 달라 지금이 다른 것인데, 자신의 비정상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이들을 바라보면 어떤 일이 벌어할까.
배 부른 이에게 '나의 배고품이 해결되었다. 그러니 배고품을 해결해준 저 집으로 함께 가서 밥을 먹어야 한다.'
막무가내로 이렇게 주장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의 말이 아무리 절절해도 상대에게 큰 의미로 다가가기는 어렵다.
이미 그 부분에서 충분히 만족되어 편안하기 때문이다.
배 부른 상태이므로 그 몸으로 힘내어 다른 일들을 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배가 부름에도 다시 이끌려 밥먹으러 가면 다른 이들이 '할일 없다'거나 '어리석다' 놀리지 않겠는가.
당신이 이제 먹은 그 밥을 다른 많은 이들은 이미 먹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밥먹는 집이 다르다고 전혀 다른 밥인듯이 말하면 바보같은 일이다.
이 식당이든 저 식당이든 그 본질이 같듯, 이 부처든 저 부처든 진정 부처라면 그 본질은 같다.
또 자신이 행해온 날들의 결과가 오늘인데, 그것을 반성하여 본연의 마음으로 되돌림이 없다면 임시방편에 불과해진다.
우리가 만나는 부처님이 가르치는 인과는 어떤 것이며 그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내가 저지른 죄업의 과보를 부처님 이름 불러 사라지길 바라는 것이 불자의 도리인가.
처음을 그렇게 시작하고 한참을 머물 수 있고 끝까지 그것에 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내고 그런 행에 들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궁극의 자리는 그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과의 중함을 알아 지난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하며 그 과보마저 수용하여 넘어서는 용기에서 편안함이 일어난다.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인과의 무서움을 알아 이제는 좋지 않은 과보에 이를 일들에 마음 움직이지 않는 결단에서 편안함이 보장된다.
바른 마음을 내도록 노력하자.
비정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바라보지 말자.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우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가르침으로 인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마주한 가르침이 참으로 정법이라면 당신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워라.
부처님이 제시하는 미덕과 전혀 가깝지 않다면 많이 반성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살려 노력한다.
덧붙여 우리가 참으로 불자라면 참부처를 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특정한 부처를 내세워 분별하는 순간 마구니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만나는 가피로 기쁨이 가득해지는 순간이 분명 있겠지만 그것으로 혼미해지지 않도록 정신 차리자.
그런 정신으로는 불법에 바르게 다가서기 어려워진다.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노력이 수행이지만, 내 비정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이 모두 그러한듯 바라보면 어리석은 일이 되기 십상이다.
오늘은 생각하고 글 적음이 수행인가, 수행에 장애됨인가 긴가민가하다.
꽤 많이 적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