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력, 타력의 분별
솔직히 자력, 타력 이런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자력, 타력을 말하는 이들의 마음이 결국은 자력의 우위를 말하거나 타력의 우위를 말하는 분별심에 머물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가볍게 여기거나 비난하는 마음에서 멀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까. 도토리 키재기, 도긴개긴이니 그 마음보나 잘 갖춰가면 좋은 일 아닐까 싶다.
무엇이 수승한가 따지기 전에 부처님의 원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원을 이루기 위한 여러가지 방편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여전히 자력, 타력을 따지면서 어리석은 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그 입을 잠시 다물고 생각해보라. 부처님들의 원은 무엇인가. 법화경에 보면 모든 부처님의 원은 중생의 성불에 있다. 그 성불을 위해 수많은 방편으로 정법을 설하심을 말씀하신다. 왜 팔만사사천의 법문인가를 생각하면 쉬이 답이 나올 것이다. 법, 수행이 우리의 근기따라 달라지지만, 법의 종착지는 오로지 한 곳, 중생의 성불에 있다.
염불을 주장하면서 자력수행자를 천하에 어리석은 듯 말하고 부처님께 귀의한 자신, 염불하는 자신만이 부처님의 가피 속에 살아가는 듯 내세우기도 하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보면 부처님이 멸도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신다. '어리석은 중생이 여래를 자주 보게 되면 중생이 생각하길 여래께서 계시니 모든 것이 손쉬운 일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삼계를 벗어나려 정진하지 않는다. 부처님 만나기가 얼마나 희귀한지 모르니, 멸도를 보이면 여래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심은 선근이 영원토록 중생에게 복이 되고 이익이 된다.'
위의 구절이 어떻게 이해되는가.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착각이기 십상이다. 산을 통째로 알아야 위에서 말하든 옆에서 말하든 단면을 말하든 비껴 말하든 손바닥만큼 보고 말하든, 전체를 빌어 그것이 어떤 지점의 모습인지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다. 위의 구절이 산의 무엇을 얼마나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나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나 이상으로 알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라. 만약 여래에게 의지하는 것만이 최고 유일의 미덕이었다면 왜 석가모니부처님은 어리석은 중생이라 하면서 스스로 삼계를 벗어나려 정진하지 않는 중생이라 말할까.
솔직히 온전한 타력이 어디 있을 것이며 온전한 자력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것을 가리는 것은 너무 의미없다. 자력이라 해도 타력의 도움을 입지 않으면 불가하거나 어려운 일이 되기 마련이고 타력이라고 해도 자력이 빠지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궁극에는 타력을 힘입은 자력으로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불이를 말한다. 같지 않지만(하나 아니지만), 다르지도 않다(둘도 아니다)는 것 아닌가. 어디 불이가 어느 한부분에만 국한되는 논리겠는가. 그러니 자력 타력을 거론하면서 분별하는 것 자체가 아직 공부할 바가 많은 우리 근기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 생각이다.
남의 행태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보았다. 이런 것을 욕하는 사람도 있다만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