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홍익학당)열반에 들어도 윤회하는 존재

향광장엄주주모니 2020. 6. 15. 11:17

가끔 뭔가 지루해지고 게을러지고 할 때 홍익학당 강의를 선택해서 본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배울 것이 있어서 좋다.

이름짓지 않는 내 수행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아쉬움이 있다.

체험을 강조하고 진리의 통합과 교류를 강조하는 모습이 좋긴 하다만 뭔가 아쉽다.

그 아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는 진리를 말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어쩐지 막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만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열반에 들어도 윤회를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새롭지 않다.

또 그것을 가지고 보살이 부처보다 한발 더 나아간 존재(?)인듯이 말하면 적당하지는 않다고 본다.

 

만약 화엄경에 나온 보살의 위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보살의 최고봉에 부처가 있음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칠지보살은 일지보살까지 아우를 수 있지만 일지보살은 칠지보살의 경지를 보이지 못한다.

각 위계에 머무름은 과정일 수 있고 세운 뜻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일 수 있다.

 

모든 것이 참나의 나툼이라면 그 나툼의 모습에 상하를 나눌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 참나에까지 나아갔는가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아가게 하기 위해 모든 불성의 나툼이 일어나고 부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이해하고 있다.

 

아라한을 부처와 동일시하면 불교 안에서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며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보여준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목적지가 아님을 이미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 굳이 그 방편에 걸려 헤맬 필요가 있을까.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 보살이 더 빛나는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불보살에 대한 본 이야기를 가리는 일이 되면 역시 아쉬운 일이 될 것 같다.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