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깨달으면 그만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고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경전 읽고 염불을 하다가 불성이 무엇인가가 궁금해졌을 때 오도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단하구나 했다. 하지만 오도했다고 수행의 끝이라 할까? 사람따라 상황따라 다르겠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모두가 무분별을 말하고 하나인 경지를 말하고 자유로운 경지를 말하지만 그것을 깨닫고 보았다고 그가 곧 그런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깨달았다고 보았다고 그것이 나라고 하기에는 본 것 그대로인 경지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가리는 것이 너무 많다.(물론 나라 할 것이 없지만 달리 표현하기가 어려운 수준이라 나라고 표현한다)
보았는가? 오도송을 읊고 나서 능히 그런 경지로 세상에 드러나는 이를? 우리가 아는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상황, 저런 상황에 평등력을 유지하고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 나와 남이 다르지 않으니 남의 아픔에 눈물짓으며 나 없는 듯한 그 마음과 행동이 나오는 사람.
깨달음이 끝이 되려면 아무런 노력없이 늘 깨달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지, 내가 깨달음인 경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시피를 알았다고 내가 그 요리기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레시피를 알아낸 기쁨은 알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많은 노력들로 기술이 나와 하나인 경지가 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레시피를 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간다. 머리로 알지만 거리가 멀다.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점차 레시피없어도 레시피대로의 요리가 된다. 더 익숙해지면 그 사람 자체가 레시피가 기술이 된다. 분리할 수 없다.
한번의 깨달음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말을 하려면 능히 그 깨달음의 실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 무식하고 수행짧은 내가 닿아있는 부처, 불성이다.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성은 드러나는 것일까? 스며드는 것일까? 내 안에 있으니 드러나기도 하고 내 밖에 가득하니 스며드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이 어떤 모습 어떤 것이라도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고, 밖에 있는 것이 제대로 스며들게 한다면 제대로의 수행 이라고 생각한다. 드러나게 하고 스며들게 하라. 한번 보았다고 장애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애될 것이 없는 경지에 올라야 이제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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