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법화경, 내가 멸한 말세 중에서 이 경을 크게 읽는다면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2. 21. 16:37

삼일 정도를 쉬고 다시 마음을 내어 법화경 독경을 하고 있습니다. 읽어나가면서 '말세의 수행으로 나무묘법연화경 연창만을 주장하는 것'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견보탑품을 읽어 나가다가 글로 적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견보탑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보여래와 많은 분신 부처님들을 모신 가운데 설법을 들으려 모인 대중에게 법화경을 받아지니라며 게송을 설하십니다. 이 경을 받아지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여러가지로 표현하면서 누누히 강조하시지요. 그 중의 한 부분을 적어볼까요.


유정천에 서서 설법하고

무수한 다른 경들을 연설한다 해도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을 한다고는 못하리나

세존의 멸도 다음에 오는 두려운 악세에서

이 경을 지니고 설한다면

이것은 곧 어렵다 하리로다

허공계를 고스란히 눌러서

한 손에 움켜잡아 내던져 버린다 해도

또한 그리 어렵다 하지는 못하리나

내가 멸한 후세에 이와 같은 경을 베낀다면

이것은 곧 어렵다 하리로다

대지를 고스란히 발톱 끝에 모아

멀리 던지고서 범천세계에 걸어 오른다 해도

또한 어렵다 하지는 못하리니

이만한 어려운 일에는

범부의 힘조차 필요치 않느니라

그러나 내가 멸한 후 말세 중에서

다만 잠시라도 이 경을 크게 읽는다면

이것을 곧 크게 어렵다 하리로다


그대들 중에 누가 말세에서

온 힘을 다해 이 경을 지니겠는가

......

말세에서 다만 잠깐이라도

이 경을 설하는 지혜로운 이는

일체 중생이 마땅히 공경하리라


게송에 나온대로 시기를 말하자면 내가 멸도한 후에 오는 악세, 내가 멸한 후세, 내가 멸한 후 말세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이 법을 받아지니는 모습으로는 경을 지니고 설하는 것, 경을 베끼는 것, 경을 크게 읽는 것을 거론합니다. 악세는 정법, 상법보다 말법의 이야기에 가깝지 않을까요? 또 후세가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이야기 전개의 흐름상 부처님이 멸도하시고 시대가 탁해져서 중생이 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를 포함한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세라고 명확하게 언급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가리는 것이 가끔은 법에 대한 이해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법화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행의 방식 중 자신이 해나갈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가지 길이 있는데 한가지만을 남기고 다른 것이 다 소용없노라고 하면 얼마나 자비와 지혜에 가까운 인도가 될 수 있는지, 법을 설하는 사람도, 법을 배우는 사람도 한번쯤은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제가 적고 있는 글 중 어떤 글들은 같은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이 글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반복된 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또 저로서도 이런 것에 매이는 이 마음이 오래 머물고 싶은 자리는 아닙니다. 다만 인연이 되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법화경이라는 하나의 가르침에서 마주하게 되었으니 내가 맛본 자유로움을 다른 이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부처님 가르침이 진짜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무엇이 바른가를 늘 생각합니다.


경을 읽든, 베껴쓰든, 설하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법을 받아지닌다면 견보탑품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대중들에게 맡기신 이 귀한 법을 제대로 받아지닌 바라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니 경을 읽고 자신에게 닿은 방식으로 수행합시다. 이것만이를 주장해서 열려 있는 길의 문을 닫아버리는 그런 일은 하지 맙시다. 자신에게 닿은 그 방식이 좋다면 그것이 좋다는 것을 주장합시다. 이것이 아니면 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경전을 바탕으로 불성에 기대어 무엇이 바른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