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을 읽다보면 서로의 가르침이 이리 저리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장경에 보면 지장보살도 관세음보살도 나오십니다. 관세음보살이 지장보살에 대해 들으시고는 찬탄하시죠. 또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왕생은 정토삼부경에만 나올까 싶은데 실은 법화경에도 나옵니다. 법화경 약왕본사품에 보면 석가모니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왕화여, 만약 후오백세 중에 이 약왕본사품을 듣고 통찰하는 여인은 이 세상에서 몸이 없어진 후에 아미타 여래께서 보살 대중에게 에워싸워 머물러 계시는 극락세계에 다시 나게 되리니 그떄 이 남자는 연꽃의 내부로 이루어진 사자좌 위에 앉은 채로 화생하리며 다시는 탐욕 진에 우치 아만 질투 분노 악심으로 괴롭지 않으리라. 이 남자는 또한 나면서 오신통과 무생법인을 받으리니 수왕화여 이 남자는 이를 소유한 까닭에 보살마하살로서 칠십이 항하사같은 여래들을 뵙게 되리라. 안근이 몹시 청정하기에 그로써 저 모든 부처님이요 세존들을 뵙게 되려니와 ..."
뒤로도 멋진 구절들이 이어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염불을 합니다. 늘 하지는 못해도 염불행자죠. 또 법화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부처님이 이중으로 극락왕생을 말씀하시니 원이 확고하여 변치 않는다면 극락왕생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되게 하려는 부처님들의 뜻'이라는 하나의 큰 흐름 안에서 다양한 형식, 이야기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 보살인가 저 보살인가, 이 부처인가 저부처인가, 이 경전인가 저 경전인가, 때로는 필요한 분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나의 근기, 뜻, 인연으로 인해 무엇이 더 적절한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래서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면 필요한 배경을 버리고 눈에 들어온 하나의 점만을 부각시키는 것과 같아서 원만한 이해로 나아가기 어려워집니다.
불법 안에서 하나의 큰 목적을 위해 다양한 모습이 있는 것이며 법을 설하는 이들은 이미 한마음으로 통하고 있는데, 그것을 따르는 이들이 스스로 작은 테두리를 만들어 이것이 더 좋다고 한다면 가르치는 이의 본뜻과는 사뭇 다른 것이 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