뵬교에 대한 이해를 두고 서로 논쟁할 때가 있다. 의도치 않게 그런 논쟁에 휩싸이기도 하고 그렇게 논쟁하는 이들을 보기도 한다. 수행 과정 끝에서 법에 대한 이해가 궁극적으로 동일해지겠지만 과정에 있는 우리로서는 서로 이해 상이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스스로 법을 온전히 아는 것인지 부족함이 있는지 그 누가 알까. 근기따라 법에 대한 이해가 변해가는 것이니, 지금의 이해가 상이하다고 너무 열을 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길이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이해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런 주장을 할 때에도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는 방식으로서는 부처를 배운 바가 깊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당신이 말하는 부분에 대해 이런 의문이 있고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그런 이해를 하는 이유가 있겠지'라는 열린 마음이 되는 것, '수행하는 나와 당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에 머무는 것, 그것이 불자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진리가 있다면 본질은 하나이지 않겠는가. 여러가지 방편으로 가르쳤으나 결국 부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도 하나이다. 그러니 진리를 통찰하여 꿰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상대의 법에 대해 확정하여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산이 있는데 그대로 뚫어보는 이가 있어 산을 보이고자 하나 듣는 이들이 고르지 않아 각자 보는 부분이 다 상이하다. 그리고 산의 어떤 것을 본 모두가 '내가 산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했을 때 그것을 틀렸다고 말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 된다. 그는 산의 부분을 보았고 더 공부하여 산을 온전히 알아차릴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이 본 것이 온전한 산이라고 주장을 하든 말든 그건 각자의 마음이나 굳이 적자면 그것에 대해서는 겸손한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부처에 얼마나 가까운가이지 않을까 싶다. 논쟁에 휩싸이거나 논쟁하는 이들을 볼 때 중하게 보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유식한 말을 하는가가 아니다. 글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상대의 심성을 본다.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변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심성이 변하고 행이 변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일이다. 그러니 사람이 거칠다면 앎이 얼마나 높든 그의 수행은 여전히 초입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도 같다. 물론 글이 거칠거나 자신만이 옳다는 상에 사로잡힌 글도 그 내용이 참 옳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따르고자 마음을 낸 불보살의 지혜와 가깝고 자비에 가깝다면 그런 글을 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수행의 과정에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또한 수행의 과정에 있으니 불성에 닿아있는만큼 자신이 바른가에 대한 생각에 이끌리게 될 것이고 빠른 전환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불성에서 일어나는 지혜와 자비는 포용하는 생각, 살리는 생각, 밝은 생각을 시시때때로 수행자에게 던져주기 때문이다.
작년 후반부터 게을러진 수행으로 인해 밝고 맑은 것이 흐려지니 불성을 알아차리는 힘역시 약해졌는가 싶다. 그래서 지금의 글이 그렇게 힘있을 것 같지 않지만, 함께 부처님 법을 공부해가는 불자로서 좋은 것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적어봤다. 법에 지극하다면 우리 마음은 자비로 나아가고 지혜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공부가 얼마나 깊든 점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