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어느 염불카페에서 한 스님의 구도기를 읽고 올렸던 글이다.
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했는지 카페지기에 의해 강제로 내려졌다.
2사람이 조회했을 때였다.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염불에 조예가 정말 깊어 내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판단했다면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알려주어야 했다.
잘못된 것은 떠나고 더 나은 것은 언제라도 수용해야 한다.
이게 옳고 저게 틀리고가 아니라 어떤 것이 더 부처님의 뜻과 가까운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런 폐쇄적(?)인 마음으로 참으로 스스로를, 주변을 밝힐 수 있을까?
법을 말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나도 그러하다.
잘못된 법으로 누군가의 눈을 흐린다면 그 감당을 정말 할 수 있는 것인지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하므로 나는 누누히 말한다.
이건 지금 내 수준에서의 앎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참고만 하라고.
내일의 나는 지금의 나와 또 다르다.
사람은 그러하므로 사람의 말은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따르면 위험하다.
마땅히 좋은 배움이 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스승의 말을 참고하되, 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스스로 배워가면서 체험을 통해 확실하게 알아가는 것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 나는 모르겠다.
아래 글은 카페지기가 내린 글이다. 읽어보니 부처님이 의식에 새겨지는 것을 말한 부분이 충분하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기본적인 생각은 지금이나 그때가 큰 차이가 없다.
예전에 염불을 시작하면서 염불에 관련된 글들을 찾아서 읽던 중, 이것만이 옳고 다른 것은 적당하지 않다, 이것만이 수승하고 다른 것은 하열하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글이 있어 마음에 걸림이 있었지요. 그래서 정토삼부경을 읽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얕은 수준이지만 아미타부처님의 뜻과 이 부처님을 따르라고 강력하게 권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고통을 벗어나 참다운 행복,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도록 한가지가 아닌 여러가지 길들을 마련해두십니다. 그 길들은 결국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는 길로, 대상에 따라 서로 적합한 바가 다를 뿐이지 유일한 정답은 없습니다. 수승함을 따지는 것은 부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된 분별심을 일으켜 오히려 바른 법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정토삼부경을 많이 읽지 못했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탁한 세상의 어리석은 중생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아미타부처님께로 인도할만큼 강력하고 원대합니다. 강력하면서 쉬운 방법이므로 그렇게 권하신게 아닐까 싶습니다.
구도기에 쓰여진 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만, 그저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적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중생이 극락왕생함은 본인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아미타부처님이 세운 대원에 적합한가의 문제입니다. 내가 설령 공덕을 쌓지 않고 선행을 하지 않고 심지어 악행을 했더라도 부처님의 서원을 믿는 마음으로 극락에 왕생할 것을 바라면서 부처님을 부르면 왕생합니다. 그것은 약속입니다. 만약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부처님을 불렀는데 왕생을 못했다면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이니, 내가 대원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마도 진실한 믿음과 진실한 바램이 없었겠지요.
죽는 순간의 생각과 극락왕생의 관계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염불은 부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내가 내생에 반드시 극락왕생할 것을 바라면서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했다면 그것은 내 의식체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침 5시에 꼭 일어나야 되는데 못일어나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고민하면서 잠을 자다가 정확히 5시에 눈이 떠지는 경험을 해봤을 겁니다. 내 의식체계에 새겨질 만큼 평소 내 원이 간절했다면, 설령 죽음의 순간 나무아미타불을 놓쳤더라도 내 의식의 체계는 부처님을 기억할테지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깨어있으나 잠을 자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 일을 시작할 때나 마치는 순간에도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한다면 죽음의 순간 부처님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는 순간에 정신이 산만하여 왕생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또 극락왕생을 한다고 똑같은 극락왕생이 아닙니다. 상품상생부터 하품하생까지 9가지 단계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압니다. 경전구절을 구체적으로 기억 못하지만, 상품상생에 가까이 갈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선하고 바른 행위들을 하는 등의 공덕이 될만한 행위들을 언급합니다. 공덕을 쌓아 회향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극락왕생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 뿐이지요. 공덕은 유익하며 복을 이룹니다. 이것이 왕생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강조로 중생이 자연히 행해야 할 바를 가벼이 여기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듯 극락왕생은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으로 가능하며,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원에 적합한, 즉 조건을 만족하는 행을 해야 합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행을 고려할 때, 많은 분들이 극락왕생이 타력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력이 개입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부분이구요. 사실 자력이니 타력이니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합니다. 단지 차려놓은 밥상도 내가 떠먹어야 내 밥이 된다고 봤을 때 차려놓은 밥상은 부처님의 대원이요, 먹는 행위가 부처님을 믿고 부르는 행위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글이 또다른 분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염불을 배워가는 한 불자의 한가지 생각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생생한 설법을 들고 법을 구하는 청정한 마음으로 선지식을 만날 수 있기를, 염불을 통해 늘 부처님과 함께 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