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자력은 희망이 없어요. 나는 타력을 택합니다.'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6. 22. 01:40

요즘 염불에 대한 생각에 꽂혔다. 이런 것을 가지고 쓰고 또 쓸 수 있으니 왜 이러나 싶다. 무엇이 이리 글을 쓰게 만들까.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염불을 하는 불자는 결국 불성에 의해 나아가게 된다고 본다. 염불자의 삶이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가리고 가려도 밝은 불성이 시시때때로 밝혀주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 바른 생각에 노출되게 된다. 그런데 그런 불성의 소리 말고 염불하여 들리는 다른 소리에 귀기울이면 부처와 어울림이 아니게 된다. 그의 염불은 어디에 있는가. 불성 이외의 존재, 그 신묘한 놀이에 사로잡히면 청정한 염불심이 오염되기 쉽다. 염불은 불성으로 나아가는 일이며 그것은 곧 나의 일이지 밖의 일이 아니다. 


또 불성일 뿐인데 왜 그리 자타를 구분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타력을 말하는 사람에게 묻건데 당신은 당신의 의지로 새기고 당신의 머리로 그리고 당신의 입으로 부르지 않는가. 그게 자력이다. 자력에 의하지 않으면 타력의 힘을 입을 수 없다. 부처님도 믿고 부르는 이를 구제한다고 경에 나온다. 믿고 부르는 것은 자력인가, 타력인가. 이렇게 구분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은 이미 삿되고 어리석은 분별심에 가까워진다. 또 자신의 불성을 믿지 않는다면 결국 완성될 수 없다. 자력에 관한 일이다. 밖에 계신 부처님이 다 이뤄줄 일이라면 지금 이 순간 부처 못이룰 사람 하나 없을 것인데 그러한가. 그러니 타력도 자력도 다 귀히 받아들임이 좋다.


선처, 이행을 놔두고 일부러 악처, 난행을 택하는 이도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고 자비이며 고결함이다. 그러니 조금 아는 것으로 다 아는듯이 말하면서 난행을 택한 이들을 경시하면 죄업에 가까워질 뿐이다. 법화경에도 분명히 나오길, 중생을 위해 좋은 몫을 버려두고 탁한 악세에 나오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의 고귀한 행을 부처님도 칭찬하시는데 당신이 무어라고 경시하는가. 당신이 무상으로 베푸는 맛좋은 케익을 앞에 두고 있을 때, 그것을 마다하고 중생과 더불어 거친 빵을 먹는 수고로움을 해나가는 수행자를 가볍게 여기는 일을 이제는 그만하는게 좋지 싶다.


그냥 염불합시다. 그냥 염불을 찬탄합시다. 괜히 난행하는 수행자, 자력의 수행자를 끌어들여 자신의 업을 키우지 맙시다. 그것이 안전하고 좋아요. 어떤 부처님이 있어 자력을 경시하며 타력을 찬탄하라 할까요? 그렇다고 해도 방편일 뿐일 것인데, 부처님이 기뻐할 일을 합시다 .그것은 다른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 있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찬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일을 합시다. 지가 뭐라고 할 이런 글을 자꾸 쓰게 되네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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