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온 가족이 모여 처음으로 지낸 설날 차례라 조금 분주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잘 지나갔지만, 아직 일부 가족 구성원에 대한 냉한 마음이 남아있음을 깨달아 찜찜함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어제 형제들이 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오늘은 늦게까지 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하다가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습니다. 블로그에 댓글이 하나 보여 확인하니 '법화경은 공왕불교가 아닙니다'라는 글에 짧은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공왕부처님은 법화경의 키워드 이자 핵심이라고 봅니다.'
댓글에 간략하게 적어볼까 하다가 샤워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세수도 안 한 더러운 몸으로 가볍게 적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샤워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으나 어떤 말을 적어야 잘 적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어졌습니다. 일단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안다고 한들 안다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인지 모르니 그 역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리 따지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적은 이의 의견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지금 제가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참고할만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적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그 생각이 정말 괜찮은 거야?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는 것은 어때?'라는 아직은 '내 생각'을 주장하는 얕고 자기중심적인 시각과 마음에서 적고픈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설이 길어졌습니다. 그럼 '공왕부처님이 법화경의 키워드이자 핵심'이라는 의견에 대해 제 생각을 적어볼까요.
먼저 그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가 법화경의 키워드, 핵심이 무엇인지 논할 수준이 되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만, 부처님이 오셔서 법화경을 설하심이, 아니 모든 부처님들의 뜻이 중생에 대한 불지혜의 개시오입에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표현을 어찌하든 '법화경이 불지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이제 묻겠습니다. 도대체 공왕불은 무엇입니까? 불지혜를 말합니까? 그렇다면 공왕불이 법화경의 핵심이라고 표현함을 틀리다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애플과 사과가 동일하여 애플이라고 말하든 사과라 말하든 아는 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왜 법화경을 읽어온 제 마음에 공왕불에 대한 주장이 편안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 주장의 면면에 법화경을 통해 이해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생각,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여러 전생을 이야기하셨고 많은 부처님의 시절에서 수행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여러 부처님들이 나오는데 왜 공왕불만이 특별한 부처님'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경에 없는 수행법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법으로 주장하면서 정작 경에 나온 수행법들을 부인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모두가 부처입니다. 한 부처가 특별하다고 다른 부처가 부처 아닌 것은 아닙니다. 멸도하신 다보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 설법 시에 나타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지장경에서도 지나간 부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은 여인(전생의 지장보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부처는 부처이며 명호를 받아 지니는 것은 다 힘이 있습니다. 이 부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논리를 불자인 저는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시대마다 각 시대의 주된 불보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불보살은 누구일까요?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이 시대는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지장보살에게 부촉되어 있습니다. 지장경에 나옵니다.
법화경은 어떤 특정한 불보살을 주장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불성의 이야기, 불지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자체가 법화경입니다. 이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것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하실 때 공왕불에게 기도했다는 개인의 주장에 따라 모든 불보살을 부인하고 오로지 공왕불만이 이 시대에 맞는 부처님이라고 주장하고 그 명호를 외우는 수행법만이 유효하다는 주장이 과연 얼마나 법다운 이야기일까요?
그럼 이제 상식을 이야기해겠습니다. 저자가 밝히고자 하는 책의 키워드라면 알아차리기 쉬울 겁니다. 특히 법화경은 비밀을 펼치는 책이지 숨기는 책이 아닙니다. 중생을 자비로 이끄시는 부처님이 알리고 싶은 키워드일진대, 당연히 그 책을 통해 강조되고 반복되고 설명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알기 쉽게 말입니다. 독자가 꼭 알기를 원하여 책을 만드는데 굳이 숨겨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법화경의 키워드라고 주장하는 공왕불, 공왕불 기도자들이 주장하는 대로의 공왕불은 이 경의 어디에 얼마나 강조되어 있습니까? 단지 한번 나올 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이에 반해 불지혜라는 단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책의 핵심, 키워드를 말하려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을 마음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심 없이, 편견 없이 법화경을 읽었다면 말이죠, 공왕불기도의 주장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불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글 적은 분이 정말 그 핵심, 키워드를 말할 정도로 누군가의 해설서가 아닌 원래 그대로의 법화경을 읽어온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과정과 결과를 통틀어 바른 모양새가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냥 법화경 읽는 것은 첫 단추를 바르게 끼우는 것처럼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같은 법이라도 자기 인연 따라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다릅니다. 아마 덕명의 인연이 그러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에 끌린 이들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 과정을 따라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지 나는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의 법이 이러하다'라고 강력하게 단호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니 말할 무어가 있을까 싶어요. 다만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부처님의 법이라면 그 법에서 시작해서 그 법에서 끝나야 부처님이 말하는 참된 행복, 안녕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사람의 시각으로 변형된 법으로 시작하는 것은 위험도 어려움도 많다고 봅니다.
글 적은 이는 지금 그의 경계에서 법화경의 핵심, 키워드가 공왕불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지금 나의 경계에서 법화경의 핵심, 키워드를 그냥 법화경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네, 불지혜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냥 법화경일 뿐입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덩어리입니다. 가장 무식하지만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을 입히지 말고 해체하지 말고 그냥 법을 법대로 받으시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때가 되면 해체되기도 하고 옷을 입기도 하고 그렇게 나아가집니다. 우리는 단지 불성이 기뻐 어쩔 줄 몰라하는 법화경을 받아 지닌 자가 됩시다.
법화경의 핵심, 키워드로 공왕불을 올리기에는 걸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냥 법대로 받아들이면 편할 일을 왜 어렵게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내 주장을 하기 위해 법이 굽어져야 한다면 주장이 틀린 것 아닐까요? 또 법을 주장하기 위해 내 주장이 꺾여야 한다면 아까워하지 말고 다 버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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