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공왕불교의 일대사인연에 대해 듣고

향광장엄주주모니 2020. 3. 22. 18:51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떠나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자꾸 이렇게 만나게 되니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잡고 있는 것인지 잘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중하다고 여기는 지점과 연관되는 것 같아서 적어봅니다. 공왕불 기도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글 적은 바가 있습니다. 솔직히 기도가 궁금해서 글 검색하는 이들이 내 글을 읽고 한번쯤 고민한다면 충분히 의미로운 일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잘모르겠네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제 생각이니 참고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법화경을 설하신 부처님만을 바라보며 그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지니고자 하는 원을 가지고 경을 읽고 사유합니다. 누군가의 법화경이라고 명명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법화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기 어렵습니다.


법화경 법사공덕품에 보면 육근의 청정 중 마지막으로 의근의 청정을 표현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드러난 뜻, 온갖 숨은 뜻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솔직히 숨은 뜻을 말할 수준이 아니라서 '그런가' 해도 아직은 명확하지 않기에 드러난 뜻을 그대로 받아지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드러난 뜻, 정말 쉬운 것 같은데요, 그거 제대로 아는 게 참 어렵습니다. 똑같은 것을 접해도 달리 이해하는 것이 이제는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우리 근기에서의 최선이 그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우리 뜻과 의지가 그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의 이해가 모든 바르게 성숙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적고자 하는 것은 드러난 뜻, 숨은 뜻의 축에 들지 못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자, 질문 하나 해볼까요? 경전을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한글자 한구절이 정제되어 있으며 경을 설하는 자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허투루 쓰인 문자, 표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왕불교(?)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그런 인정을 공유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이미 예전 글에서 적었듯이 공왕불이라 하든 말든 상관없겠으나(이미 불교에 있는 의미를 공왕불이라고 하더군요), 이미 법화경에 공왕여래라는 명칭이 나온다는 사실을 즉시한다면 '우리는 이런 부처를 공왕부처라고 하기로 했다'라는 말을 쉬이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순간 본연의 법화경에서 한발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있는 부처님을 '우리가 공왕불로 명하는 특별한 부처'라고 정하고 그 부처님에게 의지하는 별도의 불교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도가 정녕 법화경, 부처님의 가르침인지 잘모르겠습니다.


일대사인연을 공왕불교에서는 다른 의미로 바라본다고 합니다. 과거에 법화경 수행을 한 사람이 현세에 다시 법화경 부처님(공왕불)을 만나는 것을 일대사인연이라고 말한다고 하면서 사전에 적힌 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전에 적혔기에 그런 의미인 것이 아니라, 법화경에 그런 의미로 쓰였기에 사전에 그렇게 적히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나요? 일대사인연의 의미는 법화경 전반부를 통틀어 정말 핵심이 됩니다. 부처님들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비밀, 우리들도 부처가 된다는 것, 그것을 위해 모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는 것, 그것을 일대사인연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평등한 부처님 가르침을 공왕불교라고 칭하며 별도로 만들고 일대사인연이라는 용어조차 그 작은 틀에 가두어 각색해버리면 많이 위험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제가 접한 교리들은 법화경이나 부처님 가르침과 상이해서 의문이 많이 일었습니다. 여전히 그런 것이라면 권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화경을 내세우려면 근본 가르침을 흐리거나 틀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들의 일대사인연은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들어가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출현하신 부처님들의 뜻을 이르는 용어입니다. 하나 둘씩 자꾸 용어의 혼란, 교리의 혼란을 가져오면 법화경이 가르치는 바와 다른 것을 말하면서 일말의 의심없이 '나는 법화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또 그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이 공왕불교에 들어야만 법화경을 만나는 것'이라는 잘못된 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맹목은 위험한 믿음입니다


참고로 지장경에 이르길 업 아닌 것이 없다 했습니다(너무 오래되어 구절이 맞나 싶은데 맞을 겁니다). 모든 것이 업이며 그 업의 결과가 업보이니 업이 있다면 업보 또한 있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이 업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한 부처님 가르침들을 공왕불교에만 있는듯 말하면 불교를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명확한 부처님의 뜻이 담긴 용어들을 자의로 정해 공유한다면 공유하는 그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제대로 다가가는 것에 오히려 장애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고 싶다면 그것을 공부하는게 맞습니다. 법화경을 받아지니고 싶다면 부처님이 설하신 법화경을 받아지니는 것이 맞습니다. 법화경을 앞세우면서 공왕불교에서는 이런 의미로 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뒤틀어버리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고민해야 합니다. 법에 관한 것은 매우 지중한 일입니다. 이런 글을 적는 저도 늘 조심스럽습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길을 잘 살펴 마음씀과 행의 노력이 삶을 진정으로 밝히고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되도록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저에게 쪽지보내는 공왕불 기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저주에 가까운 욕을 한 이도 있었고(자신의 언행이 포교인데, 이것이 공왕불 기도하여 얻는 모습이면 하고 싶은 마음 생길까요?) 이런 쪽지를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대는 법화경 수행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나기도 어려운 공왕불 기도를 만나는 인연이 되었다고는 절대 생각 못하는 하근기인가?" 굉장히 점잖은 표현이지만 무엇이 느껴지나요? 공왕불 기도가 법화경 수행의 정점인듯 말하는 오류가 보이나요? 경에 아무리 눈씻고 봐도 없는 기도를 만든 것을 넘어 그것을 만난 것이 대단한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근기라고 합니다. 누구 그런 말을 하나요? 경전을 토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 말에 대해 제가 돌려드립니다. "그대가 어떤 근기일지 나는 모르나 법화경 수행에 대해 바른 뜻을 세워서 좋은 인연으로 들도록 힘쓰는 것이 좋다." 아무리 포장을 해도 냄새는 배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법화경을 받아지니고자 합니까? 저도 늘 그렇습니다. 그럼 그것을 받아지닙시다.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세요. 법화경을 제대로 받아지닐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근기 아닌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경전에 그리 나오니, 제대로 받아지닐 근기되어 봅시다. 

'202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22일, 나무묘법연화경  (0) 2020.03.22
중심이 잡혀야 흔들리지 않는다.  (0) 2020.03.22
비정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0) 2020.03.22
부처님의 자비  (0) 2020.03.22
기도를 주장하는 마음  (0) 202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