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카페 오종법사회를 들어가 보니 보살에 대한 논의가 한창입니다. 보살은 깨달음이 완성된 자라면서 법화경의 목적이 마치 보살에 있는 듯이 주장하던 어떤 분이 다른 분과 설전을 벌이고 있네요.
경전의 구절 하나하나를 한자어 사전까지 대동하면서 해설하는 능력과 정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큰 흐름 속에서 본다면 구절 하나에 너무 걸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다 보면 오히려 큰 흐름을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법화경은 부처가 되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부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수기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법화경을 읽고 나서 우리의 목적이 보살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부처님 뜻대로 법화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막 입문한 보살을 언급하는 구절이 법화경에 나옵니다. 그 부분에서 보살의 수준은 법화경에 대해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보살의 수준이 다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 구절이 머리에 들어왔다면 보살이 곧 부처와 동등한 수준이고 법화경이 보살이 되라고 가르치는 경전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살은 보살이고 부처는 부처입니다. 미륵보살은 보살이며 미래에 부처가 된다는 수기를 받아서 미륵불이 될 뿐입니다. 미륵보살을 미륵불이라고 표현한다고 '봐라, 보살과 부처가 같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많이 이상합니다.
너무 자신의 머리를 믿는 나머지 부처님이 설하고자 하신 가장 큰 줄기를 놓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면, 자신의 해설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이들의 바른 이해의 길을 흐린다면 그건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내 머리로 들어갈 수 없는 법이 바로 법화법문입니다. 경전에도 그리 나옵니다. 믿음으로 들어가서 이해에 이르게 되는 경전인 만큼 우리 머리를 너무 믿는 나머지 엉뚱한 길로 나아가지 말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보살은 보살, 부처는 부처입니다. 보살도를 행한다는 말에 헷갈릴 수 있지만, 보살도를 행하는 우리의 목적은 부처입니다. 그것을 헷갈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한 경이 법화경입니다.
삼승은 성문, 연각, 보살승입니다. 우리는 법화경에서 일불승을 봅니다. 일불승, 다시 말해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아닌 부처가 되는 수레입니다. 법화경은 부처가 되는 수레이지, 보살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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