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 열린 눈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기존 법화경 번역본에 대한 누군가의 비판적인 해설은 법화경이 '보살을 가르치는 경'이라고 번역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경전을 보면 보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 법문은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맞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자 사전을 보니(원래 사전을 보면 하나의 단어도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죠) 교(敎)라는 단어 해설의 3번 정도에 '~를 가르쳐 ~가 되게 하다'라는 뜻이 있나 봅니다. 그래서 이 번역은 잘못된 것이고 '법화경을 가르쳐서 보살이 되게 한다'는 번역이 맞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건 글쎄요. 전체적인 흐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로서는 이것이 아주 큰 발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정시키고 법화경을 이해하다 보니 법화경 자체가 보살이 되게 하는 법문이고 보살은 부처에 준하는, 다시 말해서 부처와 동급인 존재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십지보살처럼 부처와 하나만 차이가 있는 수준의 보살도 있지만, 법화경을 읽다 보면 이제 막 발심한 약한 보살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법화경을 가르치는 대상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여러 품을 걸쳐서 이야기됩니다. 한편으로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만한 수준이 되는 자가 많지 않으며 행여 받지 않고 비방하면 죄보를 받게 되므로 대상을 아주 가립니다. 팔만사천의 법문이 근기 따라이듯 받아들일 근기가 되면 펼쳐집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제한을 언급하지 않고 미래에 중생들이 이 법문을 받아들이게 하라고 거듭 당부하십니다.
대상을 가리는 자비가 있고 모두에게 펼치는 자비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상 가림을 말하면서 모두를 포용하는 것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한 구절만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보살을 가르치는 경이라고 번역한다고 한들 근기가 무르익으면 법문이 설해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큰 흐름 속에서 걸림 없어집니다.
또 한 가지, 보살이라는 용어를 좀 더 큰 범위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발심한 우리는 보살이며 그 수준도 아주 다양합니다. 초발심에서 십지까지. 당연히 성문이면서 보살일 수 있고 연각이면서 보살일 수 있습니다. 집을 떠났다가 아버지를 만난 장자의 이야기에서 20년을 보내면서 성숙해진 장자,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받아들일만한 근기인 장자가 바로 보살이겠지요.
이런 큰 흐름으로 이해하면 법화경이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라는 번역이 전체적인 흐름에서 잘못 이해될 일이 없어집니다. 대상을 가리지만 대상을 가리지 않는 부처님의 자비가 법문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법을 받지 않아 혹시라도 악한 과보를 얻지 않을까에 대한 염려가 있을 뿐이지, 법문은 마치 대지에 흐르는 햇살처럼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상불경보살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부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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