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성불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향광장엄주주모니 2019. 8. 21. 17:40

오늘 십선업과 십악업에 대한 승현스님 글을 읽었습니다.

글에 읽으니 업력에 의해서 윤회를 한다고 합니다. 업에는 선업, 악업, 무기업이 있습니다.

이제 인간으로 태어난 당신은 무엇에 의지하여 윤회를 끊으려 합니까?


모든 집착을 벗어난 아라한들이 생각납니다. 업은 카르마로 남아처진 힘이라고 합니다.

공을 통찰하여 머문 바 없이 평온한 아라한들은 업력에서 자유로워 윤회의 굴레를 벗어납니다.

그런데 만족스럽지 않아요. 혼자만의 평온을 주장하기에 불성이 만족하지 않으며 온전하지 않습니다.


또 이름불러 나아가는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가 생각납니다.

수명이 무한정이라 특별히 세운 뜻이 아니라면 다시는 육도로 윤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극락왕생이 자체로 성불은 아닙니다. 왕생하면 그곳에서 수행을 하게 되고 때가 되면 성불할 겁니다.)


오늘 적고 싶은 것은 업에 대한 것입니다.

윤회를 이야기하면서 업력으로 윤회한다고 하니 저 스스로도 그럼 업이 문제인가 고민스럽습니다.

일단 우리가 살면서 업 아닌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게 기본 전제예요.

그럼 늘 짓고 있는 이 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고민해봐야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에 보면 선업을 가까이 하고 악업을 멀리 하라 합니다.

왜일까요? 선업은 불자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자 자신에게는 불법을 이루는 기틀, 다시 말해 힘이 되어주고요, 세상을 향해서는 자비가 됩니다.


업력에 의한 윤회, 그 구절에 매인다면 다 업일 뿐이니 선도 악도 의미없다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루는 온갖 복이 선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만남도 선업의 과보요, 불국정토 이룸도 선업(공덕)의 과보입니다.


또 수행이 되어가는 이들의 선업은 달라집니다.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저 행해가기를 숨쉬듯 합니다.

남아서 처지는 힘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때가 되면 자신이 태어날 곳을 스스로 정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늘 스님 글을 읽고 잠깐 고민하던 저의 마음은 밝고 편안해졌습니다.

업은 기정사실이며 선업은 만복을 이루니 집착함이 없이 선업지어감으로 무량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선업이 달리 있나요? 육바라밀이 선업이며 탐진치를 벗어남이 선업이며 불성에 닿아 움직이는 것이 선업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성불의 힘이 선업에서 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네요.

앞서 적었듯이 극락정토에서의 모든 수행도 선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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